brunch

그녀가 그를 만나던 해, 초봄의 비오던 날처럼.

by 진하린


차가운 죽음이 훑고 지나간 땅 위에 초봄의 햇살이 내리쬐다 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을 머금고 있던 구름은 어느새 준비한 부슬거리는 빗방울로 목마른 대지를 포근하게 적신다.

초봄을 알리는 빗방울의 낙하는 낙화와도 같이 부드럽고 우아하다. 느릿느릿 하늘하늘 상냥한 몸놀림으로 바닥에 내려앉아 흙을 촉촉하게 만들고, 숨어있던 씨앗들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투명한 선율은 세상의 먼지를 씻어내며 회색 도시를 수채화처럼 맑게 번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느 한 소녀의 눈꺼풀 아래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초봄의 첫 비처럼 맑고, 동그랗고, 따스한 눈물이.

봄은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으나, 이번에 찾아온 봄은 예전에 지나간 어떤 날을 닮은 독특함을 품고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마치 오래된 영사기를 돌리는 소리처럼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녀가 그를 만나던 해의 그 봄의 비오던 날처럼.






그녀는 창틀에 기대어, 왼손으로는 턱을 괴고, 오른손으로는 창문 밖의 세상이 주는 시원한 바람을 누비며, 하프의 현을 타듯 손가락을 부드럽게 꼬물거렸다. 벌써 눈에서부터 뺨까지 타고 흘러내리는 동그란 구슬을 무시한 채.

그녀의 머릿속에선 그 봄의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생각할 공간을 모두 메꾸어버렸다.


그가 부르던 자신의 이름.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리 와, 비 맞겠다" 하며 자신을 끌어당기던 그 목소리.


자신이 부르던 그의 이름.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가 지어 보이던 환한 미소. 그 미소는 아직 잎이 채 자라지 않아 앙상하던 나뭇가지에 피어난, 세상의 모든 봄볕을 홀로 독차지한 목련처럼 찬란했다.


우리가 함께 부르던 노래...

처마 밑에서 빗소리에 화음을 맞추며 흥얼거렸던 이름 모를 멜로디가 귓가에 맴돌았다. 가사도 없이 그저 '음-' 하는 허밍만으로도 완벽했던 그 노래가, 지금은 빗소리에 묻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소녀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는 악보를 마주한 연주자처럼,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들어온 공기에는 비 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아련한 옛 기억의 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창밖의 비는 여전히 부드럽고 우아하게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죽은 듯 보였던 땅에서 기어이 새싹을 틔워내는 저 빗물처럼, 그녀의 눈물 또한 메마른 마음의 밭에 떨어져 추억이라는 이름의 꽃을 피워낼 것이다. 비록 그와 그녀의 마지막이 바닥에 떨어져 갈변해버린 목련처럼 추하게 끝났다고 해도, 그녀는 그 꽃다웠던 시절의 기억만을 품고 살아가리라.


그가 사랑했던 비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다시 내릴테니까.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