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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린 Mar 16. 2024

이번 주는 망했다.

(23년 11월 중순 쯤에 작성한 글입니다)

내가 계획했던 많은 일들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작게는 내가 쓰려고 했던 글을 쓰지 못했고, 크게는 내가 계획한 이사를 하지 못했다. 이 실패들이 내 마음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버렸고, 불처럼 열심히 타오르던 의욕은 그 구멍을 통해 물처럼 새어 나가버렸다.


내가 원래 쓰려고 했던 글은 할머니와 관련된 글이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지도 어언 3년이 되었는데, 요즘 들어 그때의 감정과 기억에 대해 정리를 할 필요를 느끼던 참이었다. 할머니와 함께했던 소중한 순간들이 망각 속으로 휘발되기 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기록해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든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 보던 영상에서 이 글의 도입부로 쓰기 좋은 소재도 떠올랐고, 이번에 글 쓰기 수업 주제에서도 ‘상실’과 관련한 주제가 나와서 자리가 마련된 김에 할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글을 쓰려고 자리를 잡고 나니 무언가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의 사진첩과 일기장을 뒤져보면서 글의 시놉시스를 구성하다가 그 당시의 감정과 기억이 흐릿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3년 전에 닥쳐온 상실의 순간, 그때는 모든 상황이 믿기질 않았고, 그 때문인지 내 감정이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슬프고 허전한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내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이 정말로 현실일까? 혹여나 꿈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자꾸 들었을 정도니까 말이다.

장례식 이후에도 몇 개월간은 감정의 후폭풍이 오면 내가 휩쓸려 갈까 봐 억지로 아무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 했다. 마음 같아서는 인터넷 안 되는 오지의 산장 같은 데 들어가서 아무랑도 연락하지 않은 채 사흘 밤 낮을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당시의 나는 작은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내 포지션을 대체할 만한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휴가를 써 가며 쉬었다가는 프로젝트 전체가 멈춰버릴 수도 있다는 잔인한 현실이 나를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에 들어와서도 내 마음대로 우울감에 젖어있을 여유가 없었는데, 우리 둘째 고양이가 조금만 뛰어놀아도 심장 속 피가 역류해서 콜록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HCM이라는 심장질환을 원인으로 발생하는 이 증상 때문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여주어야만 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 모든 걸 내팽개치고 싶었음에도 내 감정에 신경 쓰다 보면 일상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이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감정을 꾹 누른 채로 살았더니, 그 당시의 반년 가까운 감정과 기억이 날아가 버렸다. 분명 그사이에 둘째 조카가 태어났고, 회사에서 나름 큰 프로젝트도 했는데 일기장과 사진첩을 보지 않으면 그 당시의 기억을 살려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마치 내 것이 아닌 남의 기록을 보듯 그 당시의 광경과 묘사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꾹꾹 억눌러 깊숙이 묻어 둔 감정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려서 내 기억을 오염시킨 것만 같았다. 그만큼 내게는 큰 사건이었고, 긴 시간이 지나 글을 쓰기 위해 이걸 건드리려니 감정을 이입하는 과정 자체가 힘들었다. 마치 그 때의 기억과 감정은 금고에 들어가 있고, 그것들을 되살려내기 위해 겹겹이 쌓인 보안장치를 푸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옛 감정을 꺼내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내 마음에 생채기만 더 생겨났다. 마치 보안구역의 전기철조망을 만진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할머니를 잃었던 당시의 경험을 풀어내는 데 애를 먹는 사이, 더 큰 문제가 뒤이어 닥쳐왔다. 바로 계획했던 이사를 실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올해 중순부터 이사를 계획하기 시작했고, 짬짬이 집들을 알아보며 장밋빛 미래를 꿈꿔왔던 내게는, 솔직히 이 사건이 주는 허탈감이 글을 쓰지 못해서 느낀 것보다 더 컸다. 글이야 나중에 다시 한번 진지하게 더 시간을 들여 쓰면 써질지도 모르지만, 이번 이사 계획은 내 나이 때문에 올해가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 이사의 핵심 요소는 만 34세를 넘지 않은 ‘청년’을 위한 대출 제도가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었는데, 내 나이는 해당 조건에 턱걸이로 걸려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놈의 대출제도가 결국 나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근래 이 지역 주변을 휩쓸었던 ‘전세 사기’ 때문이었다. 사기의 폭풍이 이 지역에 몰아치기 전인 여름에 내가 알아볼 때만 해도 문제없다고 했던 내 자격요건은 어느새 부적격으로 강등 되어있었다. 부동산 투어를 마친 뒤 첫 번째로 방문한 은행에서 ‘당신은 신규 대출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땅땅땅!’이라고 확인을 받는 순간에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어서 다른 은행 두 군데를 추가로 더 찾아갔다. 그나마 첫 은행은 자기네 은행에서는 대출이 안 되지만, 다른 은행에서는 기준이 다를 수도 있다며 여지를 주는 식으로 말은 했지만, 두 번째 은행은 훨씬 단호했다. 그리고 세 번째 은행은 이미 내가 두 번이나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을 ‘당신은 암 말기로 시한부 상태이고, 3개월 후에 죽습니다.’ 라고 차트를 통해서 설명해 주는 의사의 모습처럼 차근차근 확실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무튼 그렇게 ‘팩트’로 뺨을 세 대 맞아보니,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 얼얼함은 잦아들고, 냉혹한 현실이 찾아왔다.

나는 이사를 할 수 없다는 결론. 그렇다. 나의 이사계획은 망했다. 차라리 내가 이사요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여름부터 똑같이 설명해 주었으면 진작에 포기했을 텐데, 중간에 발생한 전세 사기 사건들 때문에 갑작스레 방침이 바뀐 거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사기꾼들 때문에 생긴 피해액을 보험처리하느라 은행 잔고가 텅텅 비었다나? 그 때문에 신규대출 창구를 막은 곳도 존재한다고 들었다. 인생은 타이밍이구나 싶었다. 10월 초 쯤에 마음에 드는 집이 있어서 가계약까지 갔었지만, 부동산 측의 태도가 점점 미심쩍게 변해서 포기했던 적이 있다. 그쪽에서 미리 정한 입주 날짜를 갑자기 바꾼다거나, 가계약금을 2배를 올린다거나 하는 양아치 짓을 자꾸 시도했기 때문에 그 집 자체를 포기한 것 자체에는 후회감이 들진 않는다. 하지만 당시에만 해도 은행에서는 내게 대출이 가능했다고 말했었던지라, 차라리 그때 조건이 조금 나쁜 다른 집이라도 더 알아볼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혹여나 방을 구하면 빠르게 나가려고 싸 놓았던 짐들은, 내 실패의 증거물이 되어 한동안 나를 조롱하듯 놓여있었다.

난 머리 회전이 느린 탓에 이번 이사를 준비하는 동안 부동산과 은행에서 나눈 모든 대화를 녹음한 다음에 받아적으면서 자료를 정리해 왔다. 처음 듣는 용어들과 단위들 때문에 부동산과 은행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반복해서 다녀가면서 자료를 보완했다. 온갖 노력을 쏟아부었음에도 결실로 맺어지지 않고 휘발되는 느낌은 참으로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이 시간을 자기 계발에 힘쏟았더라면, 외주작업을 하나 더 받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간 낭비만 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었던 내 마음은 또 어떠한가? 이사 갈 큰 집에서는 자취생 3대 이모라 불리는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건조기를 모두 사서 구비해 둘 예정이었다. 게다가 격투기 팬인 내 입장에서 그 집에서 100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의 체육관이 있다는 사실도 나를 설레게 했었다. 물론 이젠 모두 다 머나먼 꿈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이사 실패로 인한 상실감은 3년 전 옛날에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느꼈던 거대한 상실감에 비하면 하찮을 정도로 작은 상실감이긴 했으나, 지금의 내게는 훨씬 강렬하고 구체적인 질감으로 다가왔다. 오랜 시간이 지나 희미해져 버린 그날의 감정과는 달리 바로 어제, 오늘의 일이었던 탓일까? 이 허탈한 기분은 내 피부를 쓸고 지나가는  차가운 겨울바람만큼이나 선명했다.




계획했던 두 가지를 망치면서 내 일주일은 허무하게 소비되어 버렸다. 원하던 바를 이루지도 못했고, 그저 머릿속만 불필요한 대출 관련 및 부동산 정보들로 지저분해졌다. 허탈함은 곧 우울감과 무력감으로 바뀌었고, 난 그저 집 안에서 멍하니 그동안 열심히 써왔던 노트 필기와 부동산 앱을 뒤적였다. 분명 더 이상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내가 놓친 내용이 있을까 싶어, 모조리 외울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이미 끝난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부정하듯 그렇게 무의미한 하루를 보냈다. 이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호들갑 떨었던 게 민망했고, 날아가 버린 기회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렇게 한동안 스스로를 질책하고 아쉬워하며 시간을 축내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타당한가? 정도가 지나친 것은 아닐까?’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고 허무해하는 것이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고 스스로 한심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결국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겠는가. 이 모든 사건을 정리하는 글을 쓰면서 머리를 식히고 나니 다른 관점으로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내 일상에서 파괴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사만 못 가는 거지 살던 집에서는 계속 계약연장을 해서 살아도 된다. 시간과 기회를 어느 정도 소비했을지언정, 살 곳을 잃거나, 큰돈을 잃은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계획했던 대로 안 되었을 뿐이고, 앞날의 계획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생겼을 뿐이다. 신선하지는 않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만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고 나니 어느 정도 제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분명 이번 일주일간의 내 기분은 최악이었다. 기회를 상실했고, 의욕을 상실했다. 하지만 머리를 식히고 돌아보니, 내가 원래 쓰려던 글은 더 큰 상실에 대한 글 아니었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했고, 그로 인해서 내 기억과 감정마저도 메말라 버렸던 과거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글 말이다. 그에 비추어 보면 지금 겪은 상실은 애송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허무해하고 힘들어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우습기도 하다.

물론 매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과거의 일보다는 현재의 일이 항상 더 또렷하고, 더 무겁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상실감을 굳이 하대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과거의 상실감을 너무 높게 쳐서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원래의 계획과 의도만 생각하면 이번 주는 망했다. 하지만 이번에 쓴 글이 신변잡기용 글일지언정 공교롭게도 상실감이라는 주제에도 맞아떨어져 버렸다.

때때로 어긋나버린 것 같을지라도 삶은 순리에 맞게 돌아간다. 일일이 신경 쓰고 힘들어할 바에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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