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어느 날 인생이 엉켰다>를 보고
25년 만에 처음으로 머리를 아주 짧게 잘랐다. 턱 밑도 아니고 귀 밑도 아니고 귀 위로 오는 머리로. 심지어 속 머리는 9mm 이발기로 시원하게 밀어버렸다. 미용실 바닥에 대형견 한 마리가 누워있는 만큼 수북하게 쌓여 있는 머리를 보며 기분이 묘했다. 저게 다 내 머리에 붙어있던 털이라니…
보통은 앞머리를 내려야 할지, 염색을 할지, 오 센티를 자를지, 십센티를 자를지를 가지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는 내가 이렇게 큰 결심을 순식간에 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영화 덕분이었다. <Nappily EverAfter>, 한국 제목으로는 <어느 날 인생이 엉켰다>라는 영화다. 태생적으로 아주 곱슬곱슬한 머리를 타고난 주인공 바이올렛은 항상 남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를 핀다. 그리고 하루 종일 혹여라도 물에 젖을까 조심조심 행동한다. 물론 그녀는 직장에서도 가족들에게도 연인관계에서도 완벽한 사람이며 스스로도 행복하다고 믿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들과 결정적으로 파혼을 하고 난 후술에 취해 충동적으로 머리를 밀어버린다. 영화는 머리를 밀어버린 주인공이 그 후로 어떻게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인생에는 중요한 것이 너무 많고도 많아 차마 알지도 셀 수도 없을 정도인데 지금까지 머리를 포함한 많은 외적 인일들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불편함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다. 그래도 해보지 않고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직접 마주하면서 싸우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내 머리를 본 남동생은 “우와, 누나 우리 진짜 닮았다.”라는 말로 나를 조금 열 받게 했고, 엄마는 “나 꼭 그 머리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머리에 힘이 없어서 맨날 실패했었어. 부럽다.”라는 말로 나를 조금 뿌듯하게 했다. 사실은 아직은 무의식 중에 어딘가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그리고 후회도 된다. 할머니께는 뭐라고 말씀드릴지, 내일 친구들의 반응이 어떨지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머리를 계속 유지할지 기르게 될지는 몰라도 그 사이에 벌 어질 일들과 오고 갈 대화들이 나를 한 발자국 더 강하게 만들어 주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