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맥북이 하나 있다.
영상 편집을 한다고 나대던 시절 산 맥북으로, 2012년형 맥북 프로이다.
지금은 2012년형 맥북이라고 하면 양로원에서도 안 쓸 법한 고물 같지만, 그땐 2014년이었기 때문에 중고로 50만원에 샀고, 그것이 꽤나 잘 한 거래라고 생각했다.
물론 영상 편집을 한다고 프리미어를 까니 마니 했지만 성실한 대학생답게 몇 번 깔짝거리고는 그만두었고, 이후 맥북은 훌륭한 유튜브 및 넷플릭스 재생 머신으로 작동하고 있다.
처음 맥북을 다루기 시작했을 때, 윈도우 독재 체제에서 충실한 마우스의 노예로 자라온 나는 터치패드라는 신문물을 접하고 콜라병을 처음 본 침팬지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 신문물은 일단 적응만 하면 신기하게도 마우스에 대한 생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게 해주는 요물이었다. 한번은 매직마우스를 구해서 써 봤는데 디자인은 제법이었으나 쓴 지 이틀만에 손목이 부서질것 같아서 즉시 당근에 내다 팔았다. 아무래도 애플은 마우스를 더럽게 못만들기 때문에 마우스가 필요 없을 정도의 터치패드를 만들었구나 할 따름이었다.
이 맥북은 사과 로고에 불이 들어오는, 얼마 남지 않은 맥북이다. 최근 모델에는 뒤에 불이 들어오지 않고 그냥 은색 스테인리스 스틸 같은 재질이라 한다. 불이 들어오는 맥북을 비싸게 수집하는 수집가도 있다고 하는데, 그 괴짜가 이걸 보면 얼른 연락을 주었으면 좋겠다.
이 맥북의 배터리 사이클 수는 무려 1007이다. 아마 이 글을 쓰고 나면 1008이 될 것이다.
경이적인 배터리 사이클이 아닐 수 없다. 1000번을 방전시켰다가 충전했다는 것이니 1000 사이클 묵은 셈이다.
그러다 보니 배터리가 닳는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체감상 1분에 1%씩 닳는다.
가끔 안 볼 때면 2%씩 닳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아마 양자역학의 신비 때문일 것이다.
이정도면 노트북이 아니라 접을 수 있는 데스크탑에 가깝다. 만약 밖에서 업무를 해야 하는데 깜빡하고 충전기를 가져오지 못했다면 반강제적 타임어택으로 업무 능률이 이상하리만치 상승하는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대개 전자기기는 배터리가 0퍼센트가 되는 동시에 꺼지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대개 배터리가 20% 혹은 10% 미만이 되면 배터리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충전을 종용한다.
하지만 1000사이클 묵은 맥북은 일반적인 통념을 과감하게 깬다.
이것은 배터리가 30% 이하인 시점에서 랜덤하게 꺼진다. 좀스러운 경고 따위는 일절 없다.
6%때 꺼질 수도 있고, 29%때 꺼질 수도 있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가 아니라 그냥 쏴버린다.
경험적인 통계를 참고해 보았을 때 대략 10~20%사이에 꺼지는 빈도가 가장 잦았다.
업무 중에 지맘대로 뻑 하고 꺼져 무저갱처럼 까매진 액정 화면을 보면 치솟는 혈압을 막을 수가 없다. 저혈압 방지용으로 제격이다.
1000사이클 묵은 맥북에는 또 다른 기능이 있다.
바로 고데기로 변신하는 기능이다.
30분 정도 사용하면 본체가 테팔 프라이팬처럼 맹렬히 달궈지는데,
노트북을 거꾸로 접을 수 있다면 고데기로도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 정도다.
허벅지 위에 맥북을 올려놓고 작업하다가 맛있는 냄새가 나서 봤더니 허벅지가 구워지는 냄새였다.
이렇게 1000사이클 묵은 맥북은 기존의 용도 외에도 다양한 쓰임이 많다.
그 쓰임이 많아 좋지만 맥북이 고생하는 것을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보상 판매를 알아보았다.
애플에서 알려주는 보상 판매 금액은 8만원이었다.
그냥 유튜브 머신으로 2000사이클까지 쓰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