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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입장정리 Aug 26. 2022

수염 뽑기에 대한 이야기

 카페에 가려고 검은 색 반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었다. 내가 그린 그림은 시티 보이와 같이 시크하면서도 활동적인 룩이었는데 화장실 거울을 보니 넙데데한 얼굴에 젖은 머리가 미역처럼 두개골에 붙어 있어 연령과 컨셉을 종잡을 수 없는 괴인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추했던 것은 메기마냥 듬성듬성 난 수염이었다.


 수염을 한 번 쓰다듬은 다음 수염 뽑기용 집게를 꺼냈다. 이것은 집게치고는 제법 거금인 6000원을 주고 산 해외의(아마 일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면 아르헨티나) 족집게로, 집는 부분이 오차 없이 정확하게 들어맞아서 무엇이든 잘 집는 기특한 집게였다. 이전에 다이소에서 샀던 천 원짜리 집게는 영 신통치가 않아 하나의 수염을 뽑기 위해 이리저리 각도를 돌려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뽑지 못하고 끊어먹기만 하는 구제불능이었다. 여러 번 수염을 뽑기 위해 시도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내 인중에 전해졌고, 나는 거울 앞에서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렸다. 새로 산 집게 덕분에 이제 콧물 말고 눈물만 흘리게 되었으니 성공한 투자였다.


 수염을 뽑기 시작한 것은 작년의 일이다. 나는 대다수의 남자들처럼 면도기로 면도를 했는데, 기술이 서툴러서인지 면도기가 별로인지 면도를 하다 피를 보는 일이 잦았다. 특히 왼쪽 수염 부분에서 역방향으로 자를 때 불상사가 자주 발생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염의 순방향으로만 자르게 되면 수염의 아랫 부분이 깎이지 않기 때문에 금세 다시 푸르스름해져 전현무처럼 되고 만다. 역방향으로 자르면 빨개지고, 순방향으로 자르면 전현무가 되는 기로에서 나는 괴로웠다. 


 면도를 하고 어김없이 피를 흘리던 어느 날, 번개같이 생각이 스쳤다. 이럴 바에 그냥 뽑으면 어떨까? 요즘 사람들이 왁싱을 많이 한다던데 수염도 뽑으면 이렇게 자주 피가 나고 전현무가 될 필요도 없지 않을까? 훌륭한 발상의 전환에 나는 그 길로 집게를 사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진지하게 수염을 집어서 뽑아 보았다. 조금 따끔했지만 뿌리까지 뽑히는 시원한 느낌이 제법 유쾌하기도 했다. 가능성을 본 나는 무 뽑기 체험을 하는 도시 꼬마처럼 신이 나서 수염을 마구 뽑았다. 그러나 유쾌함은 얼마 가지 않았다. 수염을 자꾸 뽑자 피부의 감각도 예민해져서, 처음에는 조금 따갑지만 시원하군 정도의 느낌이었으나 나중에는 옹졸한 고문기술자에게 고문을 받는 고통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특히 인중 부분의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서 하나를 뽑을 때마다 새된 비명을 지르며 발작을 일으켜야만 했다. 


 그날 수염을 한번에 다 뽑지 못해 이틀에 걸쳐 뽑았다. 몇 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며 핀셋을 잡고 얼굴에 힘을 주다 보면 눈물이 흘렀다. 그럴 때마다 무엇을 얻자고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거울 속 내 얼굴은 절반의 수염만이 뽑힌, 대단히 추악한 상태였다. 내릴 수 없는 말에는 채찍질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 째, 가시밭길을 인중으로 걷는 듯한 고통을 견뎌내고 드디어 모든 수염을 제거했다. 눈물과 땀을 흘리며 거울을 보자  전현무는 더 이상 없었다. 피도 없었다. 아기피부처럼 깔끔한 인중이 고난에 대한 보상처럼 빛났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뿌리를 뽑아서 그런지 일주일동안은 수염이 나지도 않았다는 점이었다. 행복했던 2주가 지나고, 다시 닥쳐올 고통에 수염을 파르르 떨며 집게를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 뽑는 것보다 훨씬 덜 아팠다. 자연재해를 겪은 원시인들이 깊이 정착하지 않고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수염들도 어차피 뽑힐 것을 알고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은 듯했다. 수염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항상 수염을 뽑는다. 이제는 익숙해졌기 때문에 수염 뽑는 날이 오히려 기다려진다. 잘 뽑히지 않는 수염을 이리저리 구슬려 가며 뿌리까지 뽑으면 무언가를 이룬 것 같아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집게를 소독하지 않고 수염을 뽑다간 염증이 생길 수 있다. 염증이 생기면 불편하기도 하고 보기에도 우습다. 특히 인중 정가운데에 염증이 생기면 흥미로운 버튼 같은 모양새가 되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눌러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부지불식간에 인중이 눌리고 싶지 않다면 수염을 뽑을 때는 항상 손를 잘 씻고 집게를 소독하도록 하자. 수염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으니 문득 어린 시절 여학우가 떠오른다. 그녀는 수염이 솜털처럼 나서 ‘검은수염’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 말을 듣고 불같이 화가 난 그녀는 몇 명을 때려눕힌 다음 수염을 왁싱하고 등교했다. 오래된 일이지만 인상적인 일화다. 어쩌면 그녀에 대한 기억 때문에 수염을 뽑는 방법을 떠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따라 수염이 유난히 까끌거린다. 과연 수염이 아름다웠던 그녀도 쪽집게로 수염을 뽑았을지, 혹여나 이제는 그녀의 수염이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되었을지 생각하며, 나는 남은 수염을 뽑기 위해 화장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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