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을 할 때는 적절한 의상이 중요하다. 여름이라면 아무데나 널브러져있는 반바지와 반팔을 집어입고 뛰면 되지만, 요즘 같이 쌀쌀한 날씨에는 숙고를 해서 옷을 갖춰 입어야 한다. 늦겨울의 찬바람이 두려워서 꽁꽁 싸매고 나간다면 뛰다가 너무 더워진다. 두꺼운 옷을 입고 뛰는 것은 더 많은 힘을 요구하기 때문에 열도 땀도 많이 나기 마련이다. 결국 몇 분 안 있어 호일에 싸서 구운 돼지의 꼴이 된다.
반대로, '뛰면 더워지니까 괜찮아' 라는 입장에서 얇게 입고 나가면 더워지기 전에 동태가 되어버린다. 뛰고 나서 열이 날 때까지는 일정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동안 엄동설한의 찬바람이 아무런 저항 없이 얇은 옷 속으로 침투한다. 얼마 전 추위를 얕보고 뜀박질을 하다가 코 밑에 고드름이 생길 뻔하였다.
이런 이유로 쌀쌀한 날씨에 러닝을 할 때 무엇을 입을지 고르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너무 얇지도 않고 너무 두껍지도 않게 입어야 하는데, 이는 딱 적당한 온도의 샤워 물, 아주 적절한 수준의 라면 물을 받는 것처럼 까다롭다. 며칠간 그런 고민을 하던 도중 뜻밖에도 내복과 마주쳤다. 이마트 생활 코너에서였다. 나는 무릎을 탁 치고는 유레카 하고 외쳤다. 탄력 넘치는 내복의 얇고도 탄탄한 질감은 모든 면에서 적절했다. 이것을 사서 걸치면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창피하고 두렵기도 했다. 이런 쫄쫄이 내복은 미취학아동 혹은 광대들이나 입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용성과 타인의 시선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중 문득 군복무 당시 보급받은 내복이 주던 안온함과 편안함이 떠올랐다. 마치 또다른 피부처럼 나를 보호해주던 내복의 아늑함을 기억해내자 갈 길을 모르던 마음에 확신이 생겼다.
다음 날 러닝은 새로 장만한 내복을 착용한 채로 나갔다. 놀라운 일이었다. 고작 그렇게 얇은 내복 하나 입었을 뿐인데 전혀 춥지 않았다. 마치 시골 할머니 댁의 난롯가에 앉아있는 것처럼 따뜻했다. 오늘은 아무런 걱정 없이 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따.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그 날은 바람이 좀 불던 날이었는데, 내복으로 단단히 방비한 몸통과 팔다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방한용품이라곤 살갖밖에 없던 두 손과 귀가 시렵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시려움은 귀가 조금 시려운걸? 하고 속삭이는 수준이 아니라 눈이 시뻘게진 채 귀에 대고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발악을 하는 수준이었다. 한걸음 뛸 때마다 손과 귀를 급속 냉동시키는 느낌에 뛰는 내내 손을 호호 불고 귀를 감싸고 손을 겨드랑이에 끼우는 등 염병을 떨어야만 했다.
어리석은 나는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잘 입는 것만 신경을 쓰느라 귀와 손이라는 신체 말단 부분을 신경쓰지 못했다. 신체 말단이란 자고로 심장과 더 멀고 혈류량도 적기 때문에 온도도 낮다.(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큰 것을 지키느라 하찮게 생각하던 손과 귀를 보호하지 못해 큰 고통을 겪은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다이소로 달려가 귀도리를 사고, 서랍에 처박아두었던 스키장갑을 꺼냈다. 그 조합은 어떤 추위에도 뛸 수 있도록 탄탄한 방한 성능을 선보였다. 나는 거기서 큰 교훈을 얻었다. 하찮게 여기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다. 하찮게 여기던 술 한잔이 나를 코마 상태로 끌고 가기도 하고, 하찮게 여기던 게임 한 판이 나의 휴일을 모조리 빼앗아갈 수도 있다. 하찮게 여기던 창문 틈 하나가 모기떼를 몰고 와 나의 잠을 모조리 앗아갈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을 기억하기 위해 항상 내복과 스키장갑, 귀도리를 입고 러닝에 나선다. 물론 그 셋만 입고 나간 것은 아니다. 바지와 후드도 입었다. 하찮아 보이는 것을 중요시 여기기 위해 큰 것을 포기한다면 그건 미치광이의 행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