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마주하는 자세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카네이션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들에게 카네이션은 희생이고 혁명이고 역사다.
74년 포르투갈은 40년간 지속되었던 살라자르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독재정권에 맞선 젊은 장교들의 총구에 시민들이 카네이션을 꽂아주었고 그로 인해 그들은 그 날의 일을 카네이션 혁명이라 부른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이 혁명의 시대를 기억하는 영화다.
스위스 베른의 고전문학 선생인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어느날 아침 다리난간에 올라선 여인을 구하게 되고
그 사건으로 인해 포르투갈의 현대사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인이 남긴 코트속에서 발견한 책과 그 책속에 있던 리스본행 열차표.
잠시 머뭇거리지만 지루한 일상에 우연히 찾아온 모험을 받아들인다.
여인이 남긴 책은 아마데우란 인물의 쓴 '언어의 연금술사'란 잠언집이다.
기차안에서 책을 탐독하면서 저자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하고 리스본에 도착한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를 찾아나선다.
액자식 구성의 영화는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행적을 쫓는 이야기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된 아마데우의 이야기가 교차편집 된다.
살라자르 정권하에서 혁명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있었고 그 안에 사랑과 질투와 이상과 현실이 공존한다.
기실 영화는 우연의 연속이다. 우연히 아마데우의 책을 손에 넣게 되고, 깨진 안경 때문에 만난 의사의 삼촌이 우연히도 아마데우의 옛 동지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꼭 요란스런 사건만이 아니고 실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작가는 아마데우의 글을 통해서, 그레고리우스의 모습을 통해서 '일상의 작은 우연을 외면하지 말라고' 말한다.
'지루한 삶을 관성으로 흘려보내지 말라고' 한다.
삶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그레고리우스에게 리스본행 여행은 우연한 사건이다. 하지만 그를 통해 뜨겁게 살다간 젊은이들을 만나고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된건 필연이다.
세상에 태어나고 사랑을 시작하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들의 첫 시작은 대부분 우연의 형태로 찾아온다.
하지만 그것에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는 순간 그 이후의 것은 필연으로 탈바꿈한다.
카네이션 혁명이 젊은 장교들의 분투에서 비롯되었지만 수 많은 이들의 헌신과 의지 위에 만들어낸 필연이었듯이 그레고리우스의 여행도 우연에서 시작되었지만 다시 돌아갈지 아니면 새로운 삶으로 뛰어들지는 그의 의지에서 비롯될 것이고 그 이후의 것은 필연의 영역이 될 것이다.
물론, 삶의 모든 것을 개인의 의지의 문제로 책임전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속에서 개인의 의지가 얼마나 미약한지도 안다.
다만,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는 숙명론자의 열패감이나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외치는 어설픈 근자감이 아닌 내게 찾아온 우연을 조심스럽게 받아 안고 아름답게 키워가고자 하는 작은 마음이 소중할 뿐이다.
며칠 후면 리스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 곳에 어떤 우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작은 설레임으로 조우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