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일만 한 남편이 누린 것이라고는 고작 32평 아파트 일부와 아이들이 따르는 따뜻한 아빠 자리뿐이었다. 옷을 사러 가자해도 시간이 없다 했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해도 시간이 없다 했고, 좋은 곳에 구경 가자해도 역시 시간이 없다 했다. 그러니 자연히 난 혼자 보상받을 기회를 만들었다. 혼자 여행하고, 혼자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혼자 잘 지낼 일을 찾곤 했었다.
병원과 집이 멀어 아침에 중환자실에 있는 남편을 회진하러 오시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남편 회사에서 병원 앞에 호텔을 잡아줬다.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그럴 수밖에 없어 동의하고 호텔방을 구하러 따라가는 길에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노상에서 대놓고 통곡을 하며 걸었다. 자기는 평생 일만 하고 고생한 사람이 병실 앞에서 며칠 지키고 있는 내가 힘들까 봐 이런 배려까지도 받게 해 준걸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엉엉 울면서 발걸음을 옮겨 걸었다.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부부로 사는 게 뭔지? 참 어려운 시기도 있었고, 이혼하지 않고 잘 참고 지내온 덕에 큰 딸을 결혼시키는 날도 함께 할 수 있었고, 작은 아들에게 소소하게 발생되는 일들도 함께 의논하며 지내왔다. 남겨진 시간도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맘과 같이 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쓰러진 지 이틀째 되는 날, 남편은 많이 좋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와 3시간 정도 후 수술마취에서 깨어났고, 통증으로 인한 팔, 다리 움직임이 나타났다. 본인 의지로 팔, 다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저녁 무렵에는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눈을 떴단다. 인공호흡기를 빼서 자가 호흡을 시도하고 있고 눈을 뜨고 여기저기를 보는데 낯설어서인지 여기가 어딘지는 모른다고 했단다. 나는 전혀 환자를 면회할 수가 없어서 밖에서만 대기했다. 잠깐잠깐 간호사나 의사들이 드나들 때 문틈으로나마 남편을 찾으려 무진 애를 썼다. 남편은 중환자실에서 고투하고 있었고, 나는 중환자실 밖 대기실에서 남편의 소생을 기다리며 고투하고 있었다.
중환자실 앞 대기실에서 남편의 안녕을 묻는다.
남편 회사에서 숙소를 구해 준 덕에 멀리까지 가지 않고 대기하고 있으니 좋다. 남편이 직접 예약해 주지 않았지만 간접으로나마 남편덕에 호강하는 시간이었다. 병원 앞 5분 거리에서 병원에서 오는 전화도 받고, 의사 선생님 회진시간에 맞춰 중환자실 앞에서 선생님을 만나고, 느지막이 아침도 먹었다. 남편의 회복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평소 남을 힘들게 하지 않고, 남한테 못할 짓 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신 모양이다. 이때쯤 새로운 인생을 살게끔 시간을 주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마침의사 선생님 회진 시 만나려고 일찍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중환자실에서 나오는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100퍼센트 확신의 말이 아닌 더 두고 보자는 엉거주춤한 답변에도 '선생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진 것 같아 내일은 더 좋아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