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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은 Sep 03. 2021

우산이 독일어로 뭐냐고 묻던 정우영이!

"우산이 독일어로 뭐예요?"


독일 드럭 스토어 DM에서 우산을 찾던 정우영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Regenschirm이라 알려주자 두어 번 혼잣말로 반복하더니 곧 점원에게 가서 우산이 어딨는지 독일어로 물었다. 독일어를 배운 지 한 달도 채 안돼 자신감이 없을 법도 한데, 그는 발음이나 악센트에 전혀 연연하지 않고 현지인과 대화를 했다. 그의 당당한 모습에 조금 놀랐다. 누군가 옆에 있으면 도움을 요청하기 마련인데 자기 힘으로 헤쳐나가는 모습. 당시 나도 독일어를 배우고 있던 입장이라 정우영은 내게 큰 자극을 줬다. 그래, 저렇게 부딪혀야 언어가 늘겠구나. 우산을 찾고 "Dankeschön!"까지 외친 정우영은 의기양양하게 계산대로 갔다. 2018년, 1월이었다.


당시 정우영은 바이에른 뮌헨 캠퍼스에서 생활했다. 바이에른이 유소년을 육성하는 터전이다. 어린 선수들은 그곳에서 먹고, 자고, 운동하며 프로의 꿈을 키운다. 한국에서 온 정우영도 그런 특별 관리를 받으며 언젠가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뛰는 꿈을 키웠다.


그는 운동도 운동이지만, 언어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영어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그는 독일어 수업에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바이에른은 언어에 있어서는 꽤나 보수적인 클럽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독일어를 배워야만 한다. 명장 펩 과르디올라도 바이에른에 오기 전에 독일어를 독학하고 와서 독일어로 기자회견을 진행할 정도였다. 그러니 캠퍼스에 모이는 다양한 국적의 어린 선수들이라고 예외는 없다.

 

사진: 정재은 


홀로 뮌헨으로 넘어온 정우영에게 '차근차근'은 없었다. 당장 팀 미팅에서 그는 모든 독일어를 혼자 알아듣고 이해해야 했다. 동료들이 간간히 도와주기는 했지만 열여덟 살 소년이 홀로 100% 소화하기엔 버거웠다.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투정을 부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혼자 해내야 해"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 더 열심히 독일어를 공부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정우영은 첫 2개월 동안 하루에 두 차례씩 독일어 과외를 받았다. 과외 선생님이 매일 캠퍼스를 찾아 정우영을 가르쳤다. 매일 평균 3시간 동안 공부했다. 운동하고, 먹고, 쉬는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독일어를 배운 셈이다. 과외를 '졸업'한 후에는 대학 부설 어학원에서 매일 공부했다. 매주 월, 금은 3시간씩, 화, 수, 목은 1시간 30분씩 수업을 들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동료 선수와 함께 배웠다. 초기 회화는 현지인보단 비슷한 수준의 외국인과 하는 게 더 좋다. 정우영은 두 살 어린 미국에서 온 동료와 독일어 토크를 하며 언어 장벽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시간이 흘렀다. 꿈에 그리던 분데스리가 무대에 입성했다.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무려 UEFA 챔피언스리그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나는 정우영과 믹스트존에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 도중 동료 선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정우영은 나 지금 인터뷰 중이다, 기다려라, 곧 갈게 등의 독일어를 능숙하게 해냈다. 심지어 그의 독일 발음에서 독일 축구선수 특유의 악센트가 들려 웃음이 났다. 정우영은 동료들과 장난치며 노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역시 서로 놀리고 장난치는 게 언어 늘리기엔 최고다.


잠시 후 그는 프라이부르크로 이적했다. 마침 프랑스에서 뛰던 형 권창훈도 프라이부르크로 향했다. '강제 통역사'가 된 정우영은 권창훈 덕분에 독일어에 더 많이 노출됐다. 간단한 인터뷰도 느리지만 또박또박 혼자 해낼 수 있는 정도로 성장했다. 구단 매거진에서 진행한 긴 인터뷰도 뚝딱 해냈다. 가장 좋아하는 독일 음식을 묻는 질문에 "흰 소세지(바이에른주 전통 음식)"라며 개구지게 대답하는 여유도 생겼다. 



독일어 구사가 가능하면 여러모로 이득이다. 무엇보다 자기PR이 쉽다. 통역이 필요한 선수보다, 다이렉트 인터뷰가 가능한 선수를 언론사도 더 선호한다. 특히 골을 멋지게 터뜨린 후 방송사 스카이스포츠 혹은 DAZN과 생생한 인터뷰를 할 수 있다면 최고다. 선수가 땀을 뚝뚝 흘리며 환희에 가득 찬 모습으로 인터뷰를 하는 것만큼 팬들이 바라는 게 없으니까.


얼마 전 정우영은 슈투트가르트전에서 두 골을 터뜨렸다. 9분 사이에 말이다. 전반 3분에 머리로 쾅, 9분에 왼발로 쾅. 그의 두 골에 힘입어 프라이부르크는 3-2로 승리했다. 현지 언론사의 헤드라인은 정우영의 이름으로 뒤덮였다.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축구 매거진 <키커>에서도 정우영의 사진을 커다랗게 뽑아 그의 활약을 알렸다. 정점은 스카이스포츠, 스포츠샤우 등 방송사와의 인터뷰였다. 땀에 흠뻑 젖은 정우영은 리포터의 질문에 능숙하게 대답을 이어나갔다.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폈다. 


스카이스포츠 캡처 


스카이스포츠 l "오늘 경기는 내게 최고였다. 오늘 경기에서 이겨서 너무 기쁘다. 그리고 두 골을 넣어 정말 행복하다. 우리가 이길만한 경기였다. 오늘 아주 좋은 경기를 펼쳤다. 지난 두 경기에서도 잘했다."


스포츠샤우 l "모두 함께 많이 뛰고, 좋은 경기를 펼쳤다. 팀을 도울 수 있어 기쁘다. 심지어 두 골로 도와서 더 기쁘다."


간단하지만 명료하고, 문법 실수 하나 없이 그는 자신의 기분을 또박또박 표현했다. 골을 넣은 후에도, 인터뷰 중에도 싱글벙글 웃는 그를 향해 동료 루카스 횔러는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 절로 행복해진다. 이런 동료를 누가 마다할 수 있을까"라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크리스티안 슈트라이히 감독 역시 "저런 선수를 가진 건 행운이다"라며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독일 진출 4년 차. 이제는 골도 척척 넣고, 감독의 칭찬도 받고, 독일어도 문제없이 구사한다. 4년 정도면 당연한 거 아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뮌헨에 처음 와서 어떻게 적응하고, 고생하고, 자리를 잡아가는지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팀의 에이스가 되어 방송 인터뷰를 뚝딱 해내는 모습을 보니 괜히 감회가 새롭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로 "Ich freue mich sehr!(나 너무 기뻐)"라며 웃는 모습은 '아마 안 될 거야'라는 따가운 시선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이 아닐까. 


올림픽 낙마라는 아픔은 잊고 계속 그렇게 웃으며 축구할 수 있기를. 이제 겨우 21세잖아. Ich unterstütze dich! 


사진=정재은, 스포츠샤우 및 스카이스포츠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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