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은 Sep 30. 2021

알리안츠 아레나가 찾은 '노멀' (feat. 사네)

경기장으로 가는 길. 2021-22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2차전이 열린다. 상대는 디나모 키예프. 바이에른이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는 팀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다 문득 온라인 기자회견 공지를 받지 않았다는 게 기억났다. 보통 경기 당일 오전, 구단은 취재진에게 경기 후 ZOOM으로 진행되는 기자회견 URL을 공지한다. 왜 안 왔지? 내가 확인을 못 한 걸까? 하며 메일함을 확인하는데 역시 없다.


설마... 다시 오프라인 기자회견으로 바뀐 건가?


취재 승인 메일을 다시 꺼내 천천히 읽었다.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서 기자회견이 열린다고 쓰여있다. 취재진끼리 1.5M 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꼭 착용하라는 공지와 함께. 이게 얼마만의 face-to-face 기자회견인가! 문득, 어느 순간부터 온라인으로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뉴노멀’이 익숙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히 온라인으로 열릴 거라 생각한 내가 신기했다. 동시에 점차 다시 ‘보통날’로 돌아가는 것 같아 감격스러웠다.


물론 아직 믹스트존은 열리지 않는다. 거리두기가 지켜질 수 없는 취재활동이기 때문이다. 10월부터는 조금씩 완화될 거로 보인다. 클럽도 문을 여는 걸.


주위를 둘러보니 경기장으로 향하는 팬의 수도 부쩍 많아졌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텅 빈 지하철에 몸을 싣고 경기장을 오갔다. 관중을 조금씩 허용하더니 이제는 25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80000명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지만, 지하철을 꽉 채우기엔 충분했다. 마스크를 꼈지만 이미 손에 들려있는 맥주병들, 응원가로 꽉 찬 지하철. 그 속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꾸벅꾸벅 졸며 경기장에 향하는 나. 어쩐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하철역을 가득 채운 굿즈 상인도, 원정팬들을 싣고 온 대형 버스들도, 모두 추억 속 풍경이었다.


알리안츠 아레나에 도착했다. 텅 비었던 기자실에 다시 테이블 몇 개가 놓여있다. 식사를 하거나, 음료를 마실 수는 없지만 기자석에 올라가기 전 앉아서 작업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이 테이블이 그리웠는지 기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눴다.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아서 구단 매거진을 읽으며 새로운 소식을 확인했다. 경기 시작 20분 전. 슬슬 올라갈 채비를 마쳤다. 올라가기 전 식음료 담당 직원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어준다. 한동안은 꿈도 못 꿨는데, 확실히 규제가 많이 풀리긴 했구나. 언젠가는 다시 이 기자실 안에서 내가 마시고 싶은 캡슐을 골라 커피를 뽑고, 레몬 콜라도 마시고, 동료들과 둘러앉아 식사도 할 날이 오겠지?


기자석에 노트북을 펴고 앉자마자 UCL 공식 테마송 Ligue Des Champions가 흘러나온다. 2만 5천 명의 관중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친다. 바이에른은 전반 12분 만에 레반도프스키의 페널티킥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제일 잘 나가는 공격수를 가진 팀이 보이는 '보통의' 모습이다. 바이에른의 숨겨진 10번이라 불리는 니클라스 쥘레도 거대한 몸을 이끌고 공격진까지 나와 슈팅을 때리고, 좌측의 스피드 레이서 알폰소 데이비스 역시 속도와 끈질김으로 키예브의 수비진을 괴롭혔다.


천덕꾸러기 사네, 다시 박수받는 사네로


그런 평범한 그라운드 속에서 자꾸 눈에 띄는 이가 있다. 르로이 사네다. 어딘가 늘 자신감이 떨어져 보이고, 경기력도 부진했던 사네가 어쩐 일인지 부지런히 움직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볼을 지켰다. 18분경 그러다 볼을 빼앗겼는데 놀라운 건, 전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전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터덜터덜 걷거나,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날은 바로 다음 자세를 취하고 달렸다. 사네가 웬일이지? 사네가 빼앗긴 공은 다요 우파메카노가 안전하게 걷어냈다.


35분에는 페널티 에어리어 좌측에서 직접 침투해 왼발로 강하게 슈팅했다. 골포스트에 맞고 튀어나와 모두가 머리를 감싸  상황. 그가 기세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였기에 동료들과 코치진은 크게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작 사네는 아무렇지 았다. 주저 않고 얼른 코너로  코너킥을  준비를 했다. 잠시 후에는 왼쪽 사이드 라인에서 수비 2인을 등지고 끈질기게 공을 지켜내고, 빠르게 돌아 공격을 이어나가려 했다. 그런 사네의 모습에 알리안츠 아레나를 채운 팬들이 감동했다. '르로이! 르로이!' 외치며 박수를 쳤다. 사네는 파울을 당했고,  덕분에 바이에른은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도 얻어냈다. 팬들은 계속해서 사네의 이름을 외치며 격려했다.



역시 익숙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동안 팬들은 사네를 질타하기 바빴다. 슈팅을 제대로 못 차면 탄식하고, 볼을 빼앗기면 윽박질렀다. 사네의 진심 어린 노력과 그라운드 위 열정이 그런 팬들을 바꿔놓았다. 슈팅이 부정확해도, 볼을 잃어도 오히려 그를 격려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생각해보니 사네는 원래 그런 선수였다. 질타보다는 박수를 더 많이 받는 선수. 맨체스터 시티에 있을 때는 프리미어리그를 대표하는 윙어이기도 했다. 그런 사네가, 바이에른에 와서 순식간에 천덕꾸러기가 됐다. 부상 이후 좀처럼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고, 그러다 보니 자신감이 뚝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네가 더 익숙했고.


사네의 '뉴노멀'이 '노멀'로 바뀌려던 순간,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박수를 이끌어냈다. 후반전은 정점이었다. 23분 세르쥬 그나브리의 골을 돕더니, 7분 후엔 직접 골을 터뜨렸다. 좌측 사이드라인에서 크로스를 올렸는데, 그게 골대 안으로 쏙 들어갔다. 토마스 뮐러가 달려가 사네를 꼭 안아줬다.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는 사네는 행복해 보였다. 잠시 후 교체되어 나가자 팬들은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바이에른이 5-0 완승을 거뒀다. 기분이 좋은 선수들은 팬들에게 유니폼을 던져주며 승리를 함께 즐겼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가방을 챙겨 기자회견장으로 내려갔다. 이 기자회견에서 나겔스만 감독을 만난 건 그가 호펜하임을 지도할 때였다. 이제는 바이에른 감독이 되어 앉아있다. 그도 이런 풍경이 그리웠는지, 자신의 앞에 있는 기자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며 인사를 건넸다. 사네의 활약을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오늘 놀라운 경기력을 보였다. 계속해서 골을 넣기 위해 노력했고, 60M가량 날아온 공을 받아 패스도 하고, 직접 골도 넣었다. 그가 넣은 골은 사실 의도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다행이다. 아주 퀄리티 높은 경기력이었다. 그는 인간적으로 참 밝은 사람이다. 늘 웃고, 긍정적이다. 쾰른전 이후로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 매우 기쁘다."


이전에는 사네에 관한 질문이 들어와도 "선수 개개인을 평가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일관하던 나겔스만 감독이, 어쩐 일인지 사네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나?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제자 기 살려주기엔 충분했다.


경기장에 가는 지하철 안 분위기부터 사네 그리고 기자회견장까지. 알리안츠 아레나가 예전의 평범했던 모습 그대로 돌아오고 있다. 8만 명이 들어선 관중석, 북적거리는 믹스트존 현장도 다시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는 와중에 유일한 '뉴노멀'이 딱 하나 있다면...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바르셀로나의 실점 소식. 바이에른과 같은 조에 있는 바르사는 벤피카에 무려 0-3으로 완패했다. 실시간 스코어가 전광판에 작게 뜰 때마다 바이에른 팬들은 믿기지 않는 듯 탄식을 질렀다. 바르사가 유럽을 호령하던 '노멀'한 시대를 찾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사진=정재은, 바이에른 뮌헨



매거진의 이전글 넘어진 토마스 뮐러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