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안츠 아레나는 마치 독일의 4월 같았다
April, April, Der macht was er will.
4월, 4월.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독일의 종잡을 수 없는 4월 날씨를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때아닌 8월에 ‚4월‘이 등장했다. 예측 불가한 날씨가 이어졌다. 뜨거워야 할 한여름에 16도까지 뚝 떨어지거나, 해가 쨍쨍하다가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곤 했다. 12일,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파란 하늘이 뮌헨을 반겼다. 마리엔플라츠(뮌헨 중심가)도 햇빛을 반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이 반긴 건 햇빛만이 아니다. 전날 잉글랜드 슈퍼스타 해리 케인이 뮌헨에 도착했다. 시내에 있는 바이에른 팬숍은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할 정도로 꽉꽉 찼다. ‘바이에른 월드(복합 문화 공간)’에는 케인의 유니폼이 입구에 진열되어 있었다. 스타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게다가 당일 저녁에 슈퍼컵 - 바이에른이 트로피를 들어 올릴 가능성이 큰 – 이 열리니 팬들의 흥분 지수는 하늘을 찔렀다.
슈퍼컵은 지난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자와 DFB 포칼 우승자가 만나는 대회다. 새 시즌 직전에 열리는데, 열기는 보통 그리 뜨겁지 않다. 독일축구협회에서 주관하는 공식전이지만 체감은 프리시즌에 치르는 가장 규모가 큰 친선전에 가깝다. 이번 슈퍼컵은 달랐다. 여름 이적 시장에서 세리에A 최고의 수비수 김민재를 손에 넣고, 무려 케인까지 영입했다. 신입생들이 처음으로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뛰는 순간이다. 여기서 라이프치히에 승리해 트로피까지 들어 올리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날이다.
경기 1시간 전 선발 라인업이 공개됐다. 김민재의 교체 명단은 의외였다. AUDI 2023 아시아 투어 리버풀전, 친선전 운터하힝전에서 연달아 선발로 뛰며 차츰 감각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대신 뱅자맹 파바르, 다요 우파메카노, 마테이스 더 리히트가 섰다. 김민재 선발을 예상했던 각종 독일 언론과 분데스리가 공식 홈페이지 역시 당황했을 거다. 슈퍼컵 중계를 위해 한국에서 날아온 TVN 해설 2인도.
변수가 또 등장했다. 바이에른이 경기 3분 만에 다니 올모에게 선제골을 허용했다. 바이에른 안방에서 상상하기 힘든 시나리오다. 예측 불허 날씨는 끝난 줄 알았는데.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금세 만회하는 바이에른은 온데간데없었다. 프리 시즌 경기 내내 지적됐던 한 끗이 부족한 공격력이 라이프치히 골대 앞에서도 끊임없이 등장했다. 자말 무시알라, 르로이 사네, 세르쥬 그나브리가 전부 박스 안에 들어와 공격도 소용없었다. 패스의 정확도, 슈팅의 각도와 강도가 디펜딩 챔피언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15분이 되어서야 강력한 슈팅 한방이 마티스 텔에게서 나왔다. 이마저 야니스 블라스비치가 가볍게 막아냈다. 팬들은 희망을 갖고 벌떡 일어섰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앉았다. 알폰소 데이비스가 전반 30분에 선사한 날카로운 태클과 1분 후 나온 스벤 울라이히의 선방이 그나마 환호성을 불렀다. 골에 기뻐하는 게 익숙한 이곳에서. 벤치에 앉아있던 케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두번째 골의 주인공도 올모였다. 전반전 정규 시간 종료 1분 전 격차는 두 골로 벌어졌다. 추가 시간에는 그나브리까지 골대로 내려가 수비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바이에른에 비해 이렇다 할 선수 영입이 없던 라이프치히가,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바이에른을 제압한다. 종잡을 수 없는 양상이다.
성격 급한 토마스 투헬 감독이 그대로 두고 볼 리 없다. 후반전에 더 리히트를 빼고 김민재를 투입했다. 그는 최종 수비 라인에서 든든히 뒷공간을 지켰다. 로이스 오펜다가 패스를 시도할 수 없게 꽁꽁 묶는 광경에 관중들은 환호했다. 데시벨이 절정으로 다다른 건 60분 경이었다. 워밍업 존에서 몸을 풀던 케인이 코치의 사인을 받고 바이에른 벤치로 향했다. 팬들이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반겼다. 여러 가지 기대감이 섞인 환호였다. 마침내 새로운 9번이 등장하고, 어쩌면, 그가 게임에 반전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장내 아나운서가 상기된 목소리로 “해리 케인"을 연호하는 가운데 케인이 교체로 투입됐다. 기자석에 있는 기자들까지 벌떡 일어나 그의 데뷔 현장을 핸드폰에 담았다. 오랜만에 바이에른의 최전방이 꽉 차 보였다. 그러나 기쁨과 환희도 잠시. 그가 투입된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바이에른은 페널티 킥 기회를 내주고 말았다. 때아닌 올모의 해트트릭 파티가 펼쳐졌다. 알리안츠 아레나가 차린 잔칫상 위 주인공은 바이에른의 화려한 새 멤버들이 아닌, 손님 라이프치히였다. 0-3으로 벌어진 격차를 어제 막 런던에서 도착한 공격수가 뒤집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경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라이프치히가 슈퍼컵을 들어 올렸다. 각종 ‘업 앤 다운’을 겪은 후 가까스로 뮌헨에 도착한 케인에게 바이에른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그렇게 물거품이 됐다.
잉글랜드 캡틴 앞에서 체면을 구긴 토마스 투헬은 그에게 사과했다. “이런 경기를 펼쳐 그에게 미안하다. 그는 우리가 4주 동안 훈련을 안 했다고 생각했을 거다"라고 말했다. 스벤 울라이히도 “그는 승리를 누려야만 했다. 이렇게 먼 길을 왔는데 말이다"라고 했다. 신입 선수에게 이런 사과를 하는 건 이전에 본 적이 없다. 꽤나 민망했나보다. 세 골을 내주고 질 거라곤 본인들도 상상도 못 했겠지.
독일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끝난 줄 알았더니, 알리안츠 아레나에 와있었다. 믹스트존에서 만난 트랜스퍼마르크트 관계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와우, 케인 이적 사가보다 더 정신없는 경기였어. 0-3이라니.”
사진=정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