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도 사람이란 것을 가슴은 알지만 머리로는 힘들었다...
"아, 오늘은 할 말이 없어서요... 진짜 할 말이 없네요."
김민재는 이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가 믹스트존 인터뷰를 거절한 모습을 본 바이에른 관계자는 내게 "킴, 썩 친절하지 않아 보이네?"라고 했다.
여러 가지로 속상한 찰나의 순간이었다. 첫 번째는 취재거리를 눈앞에서 놓쳤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점.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1차전, 무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인데 가장 주목받는 경기에서 김민재의 인터뷰를 따내지 못했다. 거절하는 김민재에게 나는 구질구질하게 "그래도 이겼는데..."라고 한번 더 물어봤지만 그는 떠났다. 순간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이 모든 취재의 완성은 김민재인데. 두 번째 속상한 점은 김민재가 친절하지 않은 선수로 비쳤다는 거다. 친절과 불친절을 떠나 그는 오늘 경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선수다. 경기 직후 기뻐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인터뷰를 1분만 해도 다행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인터뷰 거절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속상한 내게 바이에른 관계자는 그가 친절하지 않은 것 같다며, "할 말은 언제나 있어"라고 불을 지폈다. 나는 "있겠지만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속상한가 봐"라고 대꾸하고 말았다.
사실 첫 번째 이유로 가장 속상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런 내가 부끄러워서다. 나는 그동안 내가 따뜻하고 인간적인 기자라고 생각했다. 나의 일보다 취재원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제는 아니었다.
김민재뿐만 아니라 요슈아 킴미히, 세르쥬 그나브리, 해리 케인, 르로이 사네 등등 경기의 핵심 선수들이 줄줄이 인터뷰를 거절하고 떠났다. 다들 떠나버리는 모습을 보며 화가 났다. 못된 생각이 마구 들었다. 미디어 대응도 선수들의 업무 중 하나인데 왜 저렇게 쉽게 생각하지? 기자들이 인터뷰를 심심해서, 자기 욕심 채우려고 요청하는 게 아닌데 왜 저렇게들 무시하지? 믹스트존에서 이렇게 화가 난 적은 없던 거 같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가 혼란에 빠졌다. 한때는 그래, 선수들도 얼마나 속상하겠어, 이런 졸전을 펼치고 할 말이 없겠지..라고 생각했다. 늘 선수들을 우선으로 뒀다. 그렇게 취재거리가 없는 환경에서도 뭐라도 만들어 내는 게 기자들의 일이기도 하니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해야 하니까. 선수들을 탓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제는 내가 왜 그랬을까. 경기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였을까. 다른 경기도 아닌 UCL, 그것도 맨유전이었다. 4-3으로 양 팀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지만 의미 있는 이야깃거리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경기. 아무리 바이에른이 못했어도 어쨌든 이겼고, 승점 3점이 가진 의미를 설명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속상하면 속상한 대로 어느 부분이 잘못된 건지 설명할 수 있는 배포를 바랐다. 믹스트존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라고 공식적으로 마련된 자리다.
그런 믹스트존에서 선수들이 거절하고 지나가는 모습만 봤으니, 내 기준 '아무것도 건진 것 없는 현장'이었다. 나의 주요 콘텐츠가 온라인 기사였다면 달랐을 수도 있다. 멀리서 방송사 인터뷰만 1, 2개 주워 들어도 기사는 금방 나온다. 나의 이번 주요 콘텐츠는 기사가 아닌 영상이다. 나 혼자 듣고 써도 되는 게 아니라, 화면 안에 그 인터뷰하는 모습을 제대로 담아야 한다. 여기서 찍어 한국에 보내는 영상은 나름 단독 소스이기도 하다. 알리안츠 아레나 기자실의 유일한 한국인이기도 하고 바이에른에서 취재 경력이 꽤 되기에 본전 이상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크다. 그런 내게 어제는 정말.. 회사에 미안할 정도로 아무것도 건진 게 없는 하루였다. 한국에 있는 선배는 현장은 늘 그렇게 예측이 불가능한 곳이라고 나름의 위로를 건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뮌헨에서, 그것도 맨유전에서 이 정도밖에 하지 못한 내가 너무 한심스러웠다.
나는 단지 내가 한심했던 건데 괜히 그 화살을 선수들에게 돌린 것 같았다. 그러면서 어제 믹스트존에서 잔뜩 화가 났던 나를 반성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어제의 나. 감히(!) 김민재를 불친절한 사람으로 정의해 버리는 관계자에게 "할 말이 있겠지만 속상해서 생각이 안 나나 봐"라고 툭 던졌던 말. 그 말이 맞았을 테다. 이미 본인이 화에 잠식될 정도로 못해서 속상한데 굳이 기자들 앞에 서서 관련 질문을 받으며 하나하나 복기하고 싶지 않았겠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사실 몸이 좋지 않아 약의 힘을 빌려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취재라도 보람차고 만족스러웠다면 기분 좋게 잠에 들었을텐데, 생각이 많아져 3시가 넘도록 한참 뒤척였다. 푹 자고 다시 맑은 정신으로 생각해보니 내가 많이 부족했다.
나름 경력이 쌓였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맨유전은 내게 또 하나의 교훈의 장이 되었다.
사진=정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