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트라떼 Jun 14. 2018

여행에 꼭 목적이 있어야 하나요?

 2012년 12월부터 시작해 해를 넘겨 35일간 다녀온 유럽여행은 내 생애 최초의 배낭여행이었다. 나는 여행을 출발할 때 스물셋이었고 스물네 살이 되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요즘에야 유럽여행이 보편화되어서 주위에 한 번이라도 안 간 친구들이 잘 없지만, 그때만 해도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유럽을 그것도 혼자서 한 달씩 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 여행은 시작도 전부터 나와 주위 사람들의 공통 관심사였다.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역시 여행을 가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주로 주위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었는데 여행, 특히 긴 여행은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돈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알찬 여행을 하고 올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목적에 관한 질문을 받은 나는 곤란해졌다. 왜냐하면 아르바이트를 10개월가량 해서 번, 대학생으로서는 엄청나게 큰돈인 몇 백만 원을 들여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나에게는 딱히 여행에 대한 명확한 목적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목적을 잘 생각해보면 된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목적도 없이 여행을 가냐고 황당해했다.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는 잘 다니던 대학교를 휴학하고 목적도 없이 돈을 길거리에 흩뿌리며 방랑하는 죄인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내 여행의 목적은 뭘까, 나는 유럽에 가서 뭘 배워와야 할까. 그러고 나서 여행을 떠나기 전 일주일 전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내 여행에 다른 목적은 없고 그냥 가고 싶어서,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장소에 내 두 발로 서 있고 싶어서, 그냥 그곳에 있고 싶어서 떠나는 것이라고.  


여행할 도시들을 선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두 제각기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독일 : 소시지의 고장! 1일 1 소시지 먹기, 뉘른베르크 소시지가 제일 맛있다고들 하니 뉘른베르크에는 꼭 가야겠다, 독일어가 좋다(나는 당시 독어독문학 부전공을 하고 있었다.), 눈 쌓인 검은 숲에 가보고 싶다, 블랙포레스트케잌을 먹어보고 싶다. 

체코 프라하 : 중학교 때 프라하의 빨간 지붕 집들 사진들을 보고 처음으로 대학생이 되면 여기에 꼭 가봐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니까 내 여행의 시발점이 프라하이므로 여기엔 이유 불문 무조건 가야 한다.

폴란드 크라쿠프 :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보고 싶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려면 인근 도시인 크라쿠프에 갈 수밖에 없으니 폴란드까지 가는 교통이 좀 불편할지언정 가야 한다. 

프랑스 파리 : 나는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의 광팬이므로 비포선셋에 나왔던 장소들을 모조리 가봐야겠다. 모네의 수련을 직접 보고 싶다.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 요정이 살 것처럼 아름답다던데 겨울에 가도 요정을 찾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막상 가보니 겨울에는 요정이 아니라 마녀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홍콩 : 유럽에서 돌아오는 길에 3일 동안 스탑오버를 했다. 비포선셋을 좋아해서 파리에 가기로 한 것처럼, 홍콩은 중경삼림이 좋아서 가고 싶었다. 나는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라고 해도 여러 번 돌려보는 일이 잘 없는데, 중경삼림만큼은 수십 번을 본 유일한 영화다. 
 

소시지가 먹고 싶어서, 어떤 영화가 좋아서, 빨간 지붕을 직접 보고 싶어서, 요정이 있는지 궁금해서 등등 이런 1차원적인 호기심으로 여행을 떠나보겠다고 배낭을 꾸리는 사람에게 목적이 뭐니, 가서 뭘 배워올 거니라고 물으니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행에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어야만 하는 걸까. 낯선 나라에서 쓴 돈이 아깝지 않으려면 꼭 무언가를 배워와야 할까.  

스스로가 내린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냥 그 장소에 직접 가보고 싶어서, 그곳에 내가 있고 싶어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충분히 여행의 목적이 될 수 있다. 여행에 반드시 생산적인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하고 돌아왔을 때도 사람들은 나에게 무얼 배워왔느냐고 물었다. 배워온 것은 없었다. 소시지를 많이 먹어서 살이 조금 붙었고, 낭만의 도시 프라하에 가보니 다음에는 혼자가 아닌 연인과 와야겠다고 다짐을 했고, 파리에 다녀오니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 졌다. 그러나 서점에서 기초 프랑스어 책을 펼쳐보고는 빠르게 포기했다. 홍콩에 갔다 오니 광둥어도 배워보고 싶었다. 역시나 성조가 9개라는 소리를 듣고 바로 포기했다. 여행이 끝나고 내가 얻은 것은 약간의 몸무게와 35일만큼 조금 더 길어진 머리카락과, 배우겠다고 다짐했다가 포기한 언어 2개와 사진들, 그리고 여행 중에 만난 몇 명의 사람들이 다였고 주위의 어른들이 기대하는 어떤 것도 나는 배워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유럽여행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나는 가보고 싶은 곳에 혼자 힘으로 가보았기에 충분히 행복했고 즐거웠다. 7년 여가 지난 지금 돌이켜봐도 35일 중 하루라도 빛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는 맞았고 그때 내게 목적을 강요했던 사람들은 틀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