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문기
크라쿠프는 폴란드의 옛 수도이자 현재는 제2의 도시로 폴란드 남부에 위치해 있다. 한겨울의 크라쿠프는 어딘가 사연이 있는 듯한 을씨년스러움을 간직한 도시였다. 실제로 이 도시는 오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데, 지난 500년 간 폴란드의 수도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 정부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1월 초에 크라쿠프에 다녀왔다. 며칠을 머무르는 내내 살을 에는 추위가 이어졌다. 체코의 프라하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가 관광객들을 맞이하기에 잘 정돈된 도시 같았다면 크라쿠프는 어쩐지 쓸쓸하고 외로운, 좀 더 날 것 그대로의 동유럽 같았다.
크라쿠프 시내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가는 길은 직행버스로 2시간 남짓이 걸린다. 그러나 이 쉽고 가까운 길이 한때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멀고 고달픈 길이었을 것이다.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그런 길 말이다.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걷자 익숙한 ‘Arbeit machts Frei(노동이 너희에게 자유를 주리라)’라는 글귀가 쓰인 수용소 정문이 나왔다. 내가 간 날은 하필 날씨가 흐려 그 위압적인 문구 아래를 지나 수용소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 더욱 무겁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아니, 사실은 맑은 날이라고 어디 덜하겠는가. 400만 명의 사람들이 이 문 아래를 지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인간이 죄 없는 다른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권한은 과연 어디에서 혹은 누구에게서 부여받는가. 당시 히틀러와 나치 친위대는 그들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권한으로 그렇게 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는 1 수용소 아우슈비츠와, 버스로 약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2 수용소 비르케나우로 나뉜다. 나치가 세운 몇 개의 수용소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던 이곳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는 현재는 모두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1 수용소에서는 당시 희생자들의 소지품이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가스실이나 수용자들이 잠을 자는 공간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2 수용소 비르케나우는 개인적으로 훨씬 참담했다. 건물이라고는 몇 없는 넓은 부지에 가스실의 굴뚝들만이 솟아올라 있었다. 걸어가기엔 멀어 보이는 거리까지도 펼쳐진 굴뚝들을 보면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집단 광기에 사로잡히면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일까.
1 수용소에 걸려 있던 한 여자의 사진이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벽을 가득 메운 두 개의 큰 사진 중 왼쪽은 그 여자가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고, 오른쪽은 수용소에 들어온 뒤의 사진이다. 통통하게 살집이 있던 왼쪽 사진의 여자는 오른쪽 사진 속에서는 사람이 저렇게까지 마를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으로 서있었다. 사진 속 여자가 훗날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전쟁의 광기가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단란한 가정 아래 평범하게 살고 있었던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렸다는 점이다.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돌아보는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던 단어는 ‘왜?’였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데는 히틀러 딴에는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이유라는 것들은 결코 나의 ‘왜?’라는 물음을 끝내주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크라쿠프 구시가 남쪽에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파괴되었다가 1990년대에 복원된 유대인 지구 카지미에슈가 있다. 복원되었다고는 하지만 검게 그을려 총탄의 자국이 남아 있는 외벽과 유대인을 상징하는 별이 그려진 건물 입구 등에서 여전히 전쟁의 참상을 엿볼 수 있었다.
카지미에슈 일대를 걷다 보니 공동묘지가 나왔다. 부지의 초입에는 신원이 확실히 적혀 있고 잘 정돈된 무덤들이 있었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무덤의 형태도 없이, 또한 이름도 없이 오로지 별만 그려진 비석들이 수북이 쌓인 나뭇잎과 겹겹이 쌓인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름 없는 비석들에는 일련번호 같은 것들도 적혀 있었는데 무려 2만이 넘는 번호들이 있었다. 그게 그리 넓지도 않았던 그 공동묘지 부지에 2만 명이 넘는 사람을 묻었다는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어떤 사람들은 죽어서도 이름 없이 비석에 그려진 별로만 누군가에게 기억될 것이며, 별 하나만 그려진 그 비석조차 수십 개가 나뭇잎에 섞여 한데 어그러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져서 도저히 그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출구를 찾는데 이번에는 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게 아닌가. 그 공동묘지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도 아니었으니 찾아오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아마 내가 꽤 오랜만에 그 공동묘지의 구석까지 찾아온 손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내가 떠나면 별로만 기억될 이 사람들은 또다시 홀로 이곳에 있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겨울의 폴란드는 해가 일찍 진다. 공동묘지에서 나오니 어느덧 해 질 녘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나는 완벽한 뚜벅이 여행을 하고 있었고 숙소까지는 이미 꽤 먼 거리였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고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 질 녘 비스와 강변을 따라 걷는데 전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크라쿠프는 추웠다. 비스와 강은 아름다웠지만 크라쿠프에 와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카지미에슈에서 내가 본 것들과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아름다운 전경을 즐기기에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숙소 근처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기 위해 들어간 한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창가에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던 나를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열댓 명의 남자아이들 무리가 창밖에 들러붙어 눈 찢어진 흉내를 내며 놀려댔다. 살면서 처음으로 당해보는 인종차별이다. 그 아이들은 누가 봐도 작고 둥근 모양일 뿐인 내 눈을 찢어졌다고 놀렸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는 어린애들이었을뿐인데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서러웠을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났다. 인종차별이 서러웠는지, 아우슈비츠가 서러웠는지, 아니면 카지미에슈의 공동묘지가 서러웠는지, 추운 날씨가 서러웠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