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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트라떼 Nov 08. 2022

도시를 사랑하는 법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

여행을 좋아한다. 사랑하는 도시도 많다. 도시와 사랑에 빠진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서울은 창덕궁의 사계절과 광화문의 밤이 아름다워서, 통영은 통영항의 비릿한 바다 냄새가 좋아서, 아그라에는 세기의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타지마할이 있으니까, 홍콩은 중경삼림의 도시라서, 밤베르크는 맥주가 맛있어서, 프라하는 이름만 들어도 로맨틱하니까, 부다페스트는 야경이 멋져서, 첸나이는 대학생 때 봉사활동으로 다녀온 즐거운 기억이 있어서, 빠이에서는 스쿠터를 배웠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서, 런던은 아직 못 가봤지만 그냥 런던이니까. 





지구 곳곳에 좋아하는 도시가 이렇게나 많은데 정작 8년째 살고 있는 시드니를 좋아하게 된지는 얼마 안 됐다. 그동안 나에게 시드니는 나쁘지는 않지만 그냥 일 하는 도시,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아야 하니까 사는 도시, 휴가 갈 짬만 생겼다 하면 언제든지 탈출할 준비가 되어있는 도시였다. 그랬던 것이 웬걸,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아무리 탈출하고 싶어도 탈출할 수 없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도시 탈출은커녕 시드니는 락다운으로 몇 달 동안 집에서 반경 5km 밖도 나갈 수 없었으니 말이다. 


처음엔 우울했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던 시절이 그리웠고, 한국에 있는 가족이 아파도 갈 수 없는 현실이 슬펐다. 호주에 갇히긴 했는데 그렇다고 호주인도 아니니 나는 그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복잡했다. 


그러다 문득 언제가 될지 모를 시드니 탈출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현재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사소한 이유들로 많은 도시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시드니도 좀 예뻐해 보기로 다짐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모든 것이 변했다. 그 무렵 일터를 옮기고 좋은 동료이자 친구도 많이 만났다. 마음을 열었더니 주변도 아름다워 보이고 덩달아 좋은 사람들도 불러오게 된 건지, 아니면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서 주변도 아름다워 보인 건지 그 인과관계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마음 하나 달리 먹었을 뿐인데 나를 둘러싼 세상이 바뀌었다. 


예뻐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드니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오페라 하우스의 실물을 처음 봤을 때 느낀 감동은 호주에 온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사라졌었는데, 돌이켜보니 어렸을 때 책에서 오페라 하우스와 시드니 하버 사진을 보고 ‘나도 언젠가 커서 이런 데에 직접 가볼 날이 올까?’했던 적이 있었더라. 그 기억이 떠오른 후에 오페라 하우스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린 시절의 내게는 꿈이었던 삶을 어른이 된 나는 지루한 일상으로만 치부하고 있었구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멀리에도 있지만, 이미 내 손안에도 있었구나. 



그래서 요즘은 이 도시의 별 게 다 예쁘고 좋다. 햇볕이 따뜻해서, 자카란다가 피기 시작해서, 올해는 환절기 비염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어서, 빗소리가 좋아서(사실 올해 시드니는 이상 기후로 비가 너무 많이 내리기는 했다.), 커피가 맛있어서, 서점에서 좋은 책을 발견해서, 길거리에서 우연히 친구와 마주쳐서, 어느 가게 앞을 걸어가는 데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와서, 트레인이 제시간에 와서, 어젯밤에 좋은 꿈을 꿔서……. 




그러고 보니 도시를 사랑하는 일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비슷한 것도 같다. 우리가 아주 사소한 이유로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게 된 바로 그 사소한 이유 때문에 헤어지기도 하고, 사실 상대방은 한결같은데 내 기분에 따라 그 사람이 달라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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