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의 서울이 내게 말해주는 것
몇 년 만에 한국에 왔다.
초겨울, 차가운 서울 공기에 코끝이 시리다.
어릴 적부터 여름을 싫어하고 겨울을 좋아했다.
하지만 햇볕이 뜨거운 호주에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여름이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여름과 겨울 중 굳이 더 좋아하는 계절이 언제는 있었던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오래간만에 서울의 겨울 공기를 맡으니 “아, 나는 이 계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었지.” 하고 새삼 깨닫는다.
비슷한 작용으로, 아직도 길을 가다가 탄내를 맡으면 바라나시의 화장터가 떠오른다.
그리고 따뜻하게 데운 와인의 온기와 냄새는 나를 크리스마스 즈음의 독일로 데려간다.
공기의 온도와 냄새에는 인간의 자아와 기억을 건드리는 어떤 입자가 들어있는 게 분명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시간 지하철에 올랐다.
사람들 사이에 끼여 가다 보니 굳이 이 시간에 나왔어야 했나 싶었다가도 몇 정거장만에 금세 적응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래도 한때 신도림에서 강남까지 매일 출퇴근했던 짬밥이 있지.
광화문에서 내려 무작정 청계천변을 걷다가 버스를 타고 부암동에 갔다.
부암동의 미로 같은 언덕길을 목적지 없이 걷다 보면 이번에는 대학 시절이 생각난다.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부암동에 갔었다.
부암동의 적막함과 고요를 좋아했었는데,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니 오히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좋다.
언제나 넓은 세상과 먼 곳을 동경했다.
그래서 아무리 멀리 떠나봐도 결국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곳, 오랜 시간을 머무른 곳으로 마음이 돌아온다.
어쩌면 나의 여행은 동경과 모험이 아니라 도피였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결국 남은 것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들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