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구하는 방향과 실제 구현 사이의 모순
법에도 헌법, 법률, 명령, 규칙, 조례의 위계가 있듯이 교육과정에도 그러한 위계가 있습니다. 국가 수준 교육과정, 지역 수준 교육과정, 학교 수준 교육과정, 학급 수준 교육과정, 이렇게 내려오지요. 당연히 하급 수준의 교육과정은 상급 수준의 교육과정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상급의 교육과정인 국가 수준 교육과정은 공교육의 첫단추가 되겠지요. 국가 수준 교육과정에 모순이 있으면 지역, 학교, 학급 수준의 교육과정도 산으로 가게 됩니다.
교육과정에 대해 고찰을 하려면 먼저 그 개요를 간단하게나마 알아야겠지요? 우리 나라 국가 수준 교육과정은 교육부가 고시합니다. 교육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교육과정’을 검색하면 찾아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http://www.moe.go.kr/newsearch/search.jsp
교육과정은 크게 총론과 각론으로 나뉘어 있지요. 총론은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인간상과 교육의 큰 방향과 틀이 제시되어 있고, 각론은 각 과목의 교육내용이 제시되어 있지요. 교육과정을 분석하면서 그 방향과 실제에 대해 고찰해 보도록 합시다.
교육과정의 큰 틀과 방향을 살펴보려면 총론을 보면 됩니다. 총론의 처음은 교육과정의 성격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교육과정의 성격을 살펴보면 두 가지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국가수준 교육의 공통성 및 질 관리, 파란색으로 표시된 민주적인 과정과 다양성 존중이 바로 두 마리 토끼지요. 전통적인 교육과정은 빨간색으로 표시된 것들이 중요했습니다. 한국 전쟁 직후 우리 나라에 문맹이 정말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질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니 국가 전체 교육의 질 관리가 중요했던 것이지요. 전통적인 교육은 큰 성공을 거두어 이제는 도서지역까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공교육이 현대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기 어렵게 되었어요. 다양화되고,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를 국가 중심의 획일적인 교육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것이지요. 빨간색으로 표시된 성격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파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해 졌습니다. 교육과정도 이를 반영하여 성격과 방향에 중요하게 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육과정은 그 다음으로 추구하는 인간상과 그 인간상을 실현하기 위해 갖춰야 하는 역량을 제시합니다. 홍익인간. 많이 들어보셨지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자주적이고, 창의적이고, 교양있으며, 더불어사는 ‘바른 인성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를 키워 ‘홍익인간’의 정신을 이루는 것이 우리 교육과정의 목표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인간을 실현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6가지 역량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전 장들에서도 다룬 적이 있지요.
그리고 위와 같은 역량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를 키우기 위해 다음과 같이 ‘교육과정 구성의 중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와, 저는 이것을 읽어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제가 이전 장에서 강조했던 우리 교육의 변화 방향과 놀랄 정도로 일치하기 때문이지요.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역량 계발을 위해 학생의 적성과 진로에 맞게 선택학습과 자기주도적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 했었지요. 아마도 이건, 저 뿐만아니라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사람들이나 대한민국 교육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느끼는 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좋은 방향 설정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의 실제는 예전의 전통적인 교육을 많이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요? 국가에서 고시한 2015 개정 교육과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며 그 문제를 풀어보도록 합시다.
저는 교육과정 총론을 읽다가 교육과정의 성격, 추구하는 인간상과 갖추어야 하는 역량, 교육과정 편성의 기준까지를 읽을 때는 참 흐뭇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교 급별 교육과정 편성,운영의 기준을 읽으면서부터는 앞서 제시한 교육과정의 방향과는 모순이 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먼저 다음의 ‘학교 급별 교육과정 편성, 운영의 기준’의 기본사항을 한 항목, 한 항목 음미하시면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겠지만, 저는 여기서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교육과정 자체에 들어 있는 모순도 있지만, 학교 현장에서 교육과정의 내용이 왜곡되어 적용되는 부분들도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을 추구하면서 시기를 제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가’ 항을 보시면,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의 9년은 국가가 그 교육내용을 제시하는 ‘공통 교육과정’으로 운영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육 3년에서만 ‘선택 교육과정’으로 운영하는데, 이는 고등학생 이후의 직업과 연계된 교육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등학생부터 중학생 때까지는 국민 공통의 기본 소양을 공부하고, 고등학생 이후로는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맞게 선택해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열여주려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로 교육이란 어려서부터 나이에 맞는 형태로 실시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어린 학생들도 선택형 교육이 필요하며, 고등학교 학생들도 공통적으로 필요한 교양 지식이 있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더욱이 중학교 1,2학년을 자아를 탐색하는 ‘자유학기제’로 설정하여 운영하는데, 이는 선택 과정에 가깝지 않나 생각됩니다. 즉, 나이에 따라 공통 과정과 선택 과정으로 나누는 것은 모순이 있습니다. 어느 시기이든 공통적으로 배워야 하는 지식과 선택해서 심화형으로 배워야 하는 지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9년간 획일적인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갑자기 고등학생이 되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진로를 선택하고, 자기주도적 학습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교육부에서는 고등학교를 선택형 교육과정으로 설정하고, 자사고, 특목고, 특성화학교 등 다양한 학교를 선택해서 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만, 9년간 자아 탐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적성에 맞는 선택을 하기보다는 성적 위주로, 혹은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 고등학교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둘째, 교과의 편성과 시간 배당이 아직도 전통적인 교육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학문 중심의 교육과정 편제를 중요하게 여기며, 주요과목에 대한 개념을 깨지 못하고 있지요.
위 내용은 지극히 맞는 이야기로 들립니다만, 교과의 편성 및 시간 배당과 함께 살펴보면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먼저 공통 교육과정인 중학교의 교과군을 봅시다. 예전에 어른들이 학교를 다닐 때의 교육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선택 교과는 극히 일부에 국한되네요. 그리고 어느 교과가 더욱 중요한지도 배정된 시간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의아한 부분은 교육내용과 교과의 성격이 매우 다른 음악과 미술이 ‘예술’ 교과로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국어와 영어를 ‘언어’라고 묶는 것이 성격이 더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묶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교육과정을 편성할 때에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교과가 다른 나라 언어인 영어에 비해서도 등한시 되는 현실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교육과정이 키워야할 역량 6가지 중 하나가 ‘심미적 역량’인데, 그 역량을 키워줄 수 있는 교과는 등한시 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선택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시간 편제 입니다. 이제는 체육과 예술을 ‘체육 예술’ 영역으로 아예 묶어 버렸습니다. 몸의 움직임과 건강을 목적으로 하는 체육교과와 심미안을 길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 과목들이 무슨 연관성으로 함께 묶여있는 것일까요? 과거 주요과목과 예체능과목으로 나누어 입시와 상관없는 과목은 등한시하던 문제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선택 교육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공통 과정에 해당하는 교과교육의 비중이 아직 더 큽니다. 학교 자율과정은 86시간으로 커보이지만, 전문교과들의 예시들을 보면, 택없이 모자란 시간이라는 것을 실감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학생들의 기초소양과 기본 학력을 위해 보통교과를 편성한 것이라면, P/F제를 통하여 시험에 통과한 학생은 해당 보통 교과의 수업을 면제하는 대신 보다 많은 전문 교과들을 이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어떨까요? 제 기억상으로는 보통교과의 경우, 중학교 교육과정과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연계되는 경우가 많아, 어떤 학생들은 이미 중학생 때 기본 학력을 갖추고, 어떤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 다시 배워도 새롭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전문 교과들을 이수할 기회를 많이 주는 것이 다양성과 전문성을 추구하는 교육과정의 방향과도 부합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교육과정의 운영 기준은 바람직하나 ‘입시 위주의 학급 단위의 학습’이란 대한민국 현실이 바뀌지 않으면 왜곡되어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라’항과 ‘마’항은 잘 운영이 된다면 학습자의 수준과 특성에 맞는 교육을 운영하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집중 이수를 통해 해당 과목에 집중하여 보다 깊이 있게 공부를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운영은 어떠할까요? ‘라’항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세 개의 학년군이 있지만, 모든 학교가 6개 학년으로 나누어 해당 학년에 해당하는 교과서를 가르치고 있지요. 한 학급에게 전체학습을 실시해야 하는 교사가 3,4학년 군에 영어3, 영어4 교재가 있다면, 3학년에게 영어3을, 4학년에게 영어4를 가르치는 것밖에 답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마’항은 입시위주의 교육을 위해 악용되는 사례도 있지요. 제가 고등학생 때도 집중이수제가 있었는데, 1학년 때는 미술을, 2학년 때는 음악을 배웠습니다. 고3때는 수능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예술 과목은 배우지 않았지요. 대한민국 현실에서 대학을 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교육과정을 편성하는 교사들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는 여러 가지 제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특히 학습자가 자신의 수준과 흥미에 맞게 교과목이나 배우는 시기를 선택하여 배울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창의적 체험활동의 확대와 체계적 운영이 필요합니다.
창의적 체험활동은 ‘바른 인성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라는 우리 교육과정의 인간상을 기르는 데에 가장 유용한 영역입니다. 교과영역은 지식을 중심으로 편성이 되지만 창의적 체험활동은 학습자를 중심으로 편성이 되지요. 그런데 다음 시간 편성을 보십시오. 초등학교의 시간 배당 기준인데 학년군이 올라감에 따라 창의적 체험활동의 비율이 줄고 있습니다.
중학교 시간 배당도 살펴볼까요? 초등학교 때보다 비율이 더 줄어들었네요.
시간수로만 보면 그래도 여타 교과처럼 많은것처럼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체험활동, 봉사활동, 동아리, 학교 행사 등이 모두 창의적 체험활동에 포함이 됩니다. 이 중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동아리활동’ 정도인데요, 창의적 체험활동의 극히 일부에 해당하며, 창의적 체험활동의 프로그램들도 학교 전체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교육부나 교육청에서 ‘컴퓨터 교육을 실시해라.’, ‘한자교육을 실시해라’ 등의 요구사항이 내려오면 대부분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으로 운영을 하게 되는데, 학교의 선택권도 한정되어 있는 셈입니다. 즉, 학생들의 소질과 잠재력을 개발하고 인성을 함양하기 위해 ‘학습자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마저도 ‘권위자 중심’으로 구성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배울 것은 수도 없이 많은데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나 적성을 위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적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의 경우 ‘동아리 시간’은 한 학기에 8시간 입니다. 여타 교과와 절대 비교할 수 없는 시간이지요.
그밖에도 교육과정을 죽 읽다보면, 현재 학급이나 학교의 형태에서 이루기 어려운 이상적인 말들을 나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 내용은 참 이상적인 내용이지만, 학생과 교사 입장에서 읽으면 웃음만 나옵니다.
‘마’항처럼 교과목별 학습목표를 모든 학생이 성취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요? 이 목표는 처음부터 무리수로 보입니다. 다양한 수준과 능력의 한 교실에 섞여 있는 상황에서 교사 한 사람이 어떻게 학습자 개개인에 맞는 다양한 학습의 기회와 방법을 제공할 수 있겠는지요? 또한 ‘바’항처럼 특별 보충 수업을 운영한다고 해도 정규수업을 못 따라가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항의 경우도 오늘날과 같이 학생의 인권이 중요하게 대두되는 상황에서 성적을 나누어 수준별 수업을 실시한다는 것은 일어나기 힘든 일입니다. 읽다보면,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보다는 듣기 좋은 말은 다 모아서 나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입니다. 현실적으로 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학급, 학교의 형태부터 교과의 내용까지 많은 부분에서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국가 수준 교육과정으로 국가 교육의 공통성을 만들고, 질 관리를 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맞는 인간상과 역량을 키워내고 싶다면, 교육의 내용과 방법도 바뀌어야 합니다.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을 할 때, 전통적인 교육 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많은 결정권을 단위학교나 교사와 학습자에게 넘겨야 할 때입니다. 지나치게 교과 중심적이었던 사고에서 벗어나 학습자 중심으로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이 바뀌어야 합니다. 국가 수준 교육과정은 큰 틀로서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고, 세부적인 것들-가령 시간 편제나 과목의 선택, 과목 학습의 시기 등-은 학습자의 특성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육과정에서 말하는 인간상을 길러낼 수 있고, 교육 당사자인 학생, 학부모, 교사의 행복감도 증가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