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일’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한다면?
‘교사란 무엇인가?’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사가 하는 일들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사가 하는 일들이 타직업과 가장 다른 점은 무슨 일을 하는지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교사는 가르치는 직업입니다만-그렇게 생각하면 참 쉽습니다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교사가 하는 일이 참 복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잘 치료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의사가 소심하든 성격이 불같든 그런건 환자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의료윤리를 잘 지키면서 환자를 잘 치료하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백화점 점원은 친절하게 물건을 판매하고, 안내를 합니다. 농부는 작물을 심고, 가꾸고, 수확을 하지요. 회사원들에게는 각 부서마다 명확하게 주어진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가 하는 일은 마치 가정주부처럼 복합적입니다. 아이들의 과목 교육을 하며, 인성 교육 및 진로 교육도 해야 합니다. 쉬는 시간에는 아이들이 노는 것도 살펴야 하며, 점심 시간에는 밥을 골고루 먹도록 급식지도도 합니다. 청소 지도도 해야 합니다. 때때마다 학교 행사를 통해 학생들이 여러 경험을 하는 것도 돕고, 학생들과 함께 체험학습도 갑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트러블이 생기면 중재하는 일도 해야 하며, 상처 입은 아이들을 상담하기도 합니다. 또한 아이들을 학교에서 보호하고, 때로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이들이 있다면 이를 살피고 신고하는 의무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가치관이나 생활 습관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가정주부와 비슷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는데, 어느 선까지 노력해야 하는지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회사원들이 보고서를 쓸 때에는 보고서의 틀이나 분량이 정해져 있고, 판매원이 판매를 할 때에도 판매목표량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사가 하는 일은 집안일처럼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쏟으려면 끝도 없습니다. 대신, 조금 덜 한다고 해서 왜 제대로 하지 않았냐고 하기에도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직업인들은 실적을 수치화하는 것이 가능하지요. 판매 실적이라든지, 수확물의 양이라든지, 성사시킨 거래가 무엇이라든지, 얼마나 어려운 수술을 성공했는지 등등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교사가 한 일의 성과는 수치화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잘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유능함을 드러낸다면 학생의 성적이 얼마나 많이 올랐나를 보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역마다 학교마다 학생들의 수준이나 생활여건이 다른데, 그런 식으로 평가한다면 생활환경이 좋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실적이 높아지겠지요. 더욱이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인성교육인데 인성교육은 애초에 수치로 환산이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어떤 아이들의 경우, 교육의 효과나 폐해가 바로 나타나지 않고 여러 해에 거쳐 누적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아이의 상태가 전적으로 현재 가르치는 교사에게 달려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교사가 하는 일들을 명확하게 정의내리기는 어렵습니다만, 교사가 하는 일들의 특징을 살펴볼 수는 있습니다. 첫째로 교사는 미성숙한 인간의 발달을 돕는 직업입니다. 성숙한 인간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성숙한 인간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강사의 의무는 그 지식을 알기 쉽고 친절하게 전달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한 편, 학생들의 보호자도 되어주어야 하고, 인격 성숙도 도와야 합니다.
둘째로 교사가 하는 일인 교육은 공적 사업이며 봉사정신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적 사업은 사회에 도움을 주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나 그 일을 개인 사업으로 했을 때 큰 이득이 남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 다 가르치는 일이지만 학원과 학교가 다른 점은, 경제적 형편이나 태도가 형편없는 아이들도 무조건 수용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학원에서는 태도가 심각하게 불량하면 쫒아낼 수 있지만, 학교에서는 어떻게든 학생의 상처를 살피고 적응을 하도록 도와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직업’이라고 봉사정신 없이 교사를 선택한 교사들은 호되게 힘든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셋째는 교사가 한 일의 성과는 현재가 아닌 미래에 나타나며, 자신이 아닌 타인을 통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교사는 교과와 인간발달에 대한 전문지식과 함께 미래를 볼 수 있는 현안을 갖춰야 합니다.
교사가 하는 일이 복합적인 형태를 띄고, 앞서 말한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직관도 다양합니다. 저 많은 특징 중 무엇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교사의 교직관이 달라집니다. ‘교사론’을 다룬 책들에서 다루고 있는 교직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인간발달을 돕는 인류애에 입각한 봉사직이라고 생각하는 교사들은 성직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직자처럼 교직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헌신을 다해 봉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교육이 국가의 공적 사업임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은 공직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회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를 키워 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명감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성직관과 통하는 면도 있습니다. 교사를 국가에 고용된 노동자로 보는 교사들은 노동직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동은 가치로운 것으로 최선을 다해 일을 해야 하지만, 노동자의 인권도 보호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문직관을 들 수 있는데, 교과교육과 인간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추고 이를 수행하는 전문직이라는 시각입니다. 전문직은 오랜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고 특정 지식이나 기능을 독점하고 있으며 고도의 자율성, 윤리성, 봉사성이 요구되는데 교사도 그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의 경우는 전문직관에 입각한 예술가적 교직관을 가지고 있는데, ‘예술가관’은 제가 생각하는 독특한 시각으로 어느 ‘교사론’ 책에도 나와있지 않습니다. 저는 교사가 노동자이며(노동자관) 공직이라고 생각하지만(공직관) 헌신을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직관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노동자관이나 공직관도 저의 교직에 대한 생각에는 미미한 영향밖에 미치지 못합니다. 저는 국가의 요구는 존중하지만 만약 국가의 요구가 학생 발달을 저해한다고 판단이 되면 이를 따를 생각이 없으며, 진정으로 바람직한 직업이란 돈이 제1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교사란 교과 지식과 인간의 발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발달을 돕는 전문가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삶을 살면서 학생들이 그들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예술가란 자신이 가치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음악이든 미술이든 무용이든 영화든 효과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교사라는 직업은 저의 정체성의 일부일 뿐입니다. 저는 그림 그리는 것과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통해 제가 가치롭게 여기거나 흥미있게 생각되는 것을 표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런 생각들을 학생들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물론 저의 가치관을 학생들에게 강요하기보다는 그들의 삶의 가치와 방향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술가임과 동시에 전문직인 교사가 되는 것이 제가 지향하는 교직관 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교사들은 어느 한 가지 교직관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여러 가지 교직관이 결합된 자신만의 교직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사들에게 요구되는 교직관은 참으로 다양한 형태를 띕니다. 교사와 학생,학부모,국가 등 관련자가 다른 교직관을 가지고 있을때 부딛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국가에서는 교사가 국가의 명령에 충실하기를 요구하는 공직관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확고한 전문직관을 가지고 있는 교사는 국가의 요구가 자신의 전문적 견해와 반하면 이를 따르지 않습니다. 예컨대 국가에서 일제고사를 실시하였을 때, 입시 위주의 교육의 병폐를 비판하는 교사들이 일제고사 실시일에 교육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현장체험학습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교육청에서는 해당 교사들의 교사직을 박탈하였던 일이 있었는데,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든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교사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은 사례라 하겠습니다.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교사들이 전문가이길 바라는 동시에 성직관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교육에 임하길 은근하게 바랍니다. 한 예로 아이가 아파서 부모가 문자를 보내 결석할 것임을 알렸고 교사가 알았다고 답문을 한 경우, 자신의 아이에게 괜찮냐고 전화를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서운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아이가 수업 시간에 떠들고 과제를 해오지 않아도 예뻐해주길 바라지요. 이 면이 참 재미있는 점입니다. 상식적으로 인간 관계는 give and take 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공평하게 잘 해야하는 것인데도, 학부모들은 교사가 부모처럼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길 바랍니다. 성직관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노동직관과 전문직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교사는 학생이 교사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자신의 전문성에 도전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사의 의무는 성실하게 가르치는 것이지 사랑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이처럼 교사가 하는 일이 하나로 정의하기가 어렵고 복합적이다보니, 교사의 의무에 대해서 사람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이 다른 데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사의 일’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의 일’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한다면 어떻게 정의를 내리는 것이 비교적 합리적일까요? 교사가 하는 많은 일들 중 어디까지가 의무로 볼 수 있을까요?
먼저 공직관의 측면으로 보면, 교사는 봉사정신을 가지고 ‘교육’이라는 공적 사업을 하는 것이므로 모든 학생에게 공평해야 하며, 국가나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국가수준 교육과정의 인간상-를 길러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학생의 성장 발달과 인권을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교사의 교육에 대한 자율성을 인정해주고, 부당한 명령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노동직관의 측면에서 보면, 교사가 자신의 인권과 권리를 주장할 때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업을 등한시하고, 교재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은 질책의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권을 침해 당했을 때에 그것을 ‘제자를 위해 참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정당한 권리 주장과 인권 침해에 대한 고발은 다른 노동자들처럼 교사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교사답지 못하다는 식으로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전문직관에서 보면, 교사는 교과 지식과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전문성을 쌓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한 편, 학생에게 맞는 교육을 위해 교사의 전문성에 입각한 자율성 인정이 필요합니다. 또한 교사의 전문성에 대해 정의하여 교사가 해야하는 일의 범위를 분명히 명시해야 합니다. 교사가 책임질 일에 대해 명시하는 것은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도움이 됩니다. 교사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제한함으로써 지나치게 많은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학생은 교사에게 반드시 받아야할 교육 서비스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과교육에 대한 전문성은 명확하므로, 교육의 다른 분야의 전문성들에 대해 살펴 봅시다. 최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인성교육입니다. 교사가 인성교육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사가 인성교육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문제가 많습니다. 인성의 가장 큰 부분은 가정에서 형성되고 학교는 도울뿐이기 때문입니다.
교사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바른 언어를 사용하고, 질서를 지키는 것에 대한 지도를 해야 합니다. 또한 친구들 간에 사이좋게 지내도록 권장하고 학교 폭력 예방 교육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학교나 교실 내에서 학교 폭력을 보게 된다면 이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교실이나 학교 내에서 학교 폭력을 목도하고도 교사가 모른채 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교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교실 밖이나 인터넷 상황에 대한 책임까지 교사에게 지워서는 안 됩니다. 이는 경찰이 해결할 일에 가깝습니다. 교사가 신도 아닌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다 책임지게 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학교 폭력은 담임교사의 잘못보다는 사회적 상황과 개인, 가정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집단상담과 개별상담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면서 학생에게 도움을 줄 의무는 보다 전문가인 상담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경우 심리 전문가에게 학생을 연결해줄 의무가 있을 뿐입니다.
교사의 전문성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교사가 진로에 대한 전문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학생 개인의 성격과 적성에 맞는 진로 교육이 더욱 중요합니다. 교사는 학생의 장래희망을 조사하는 것 이상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진로교육을 실시해야 할 것입니다. 진로 교육은 인성교육과 함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격과 특징을 돌아보게 하고, 관심있는 분야에서 성실하게 자기주도학습을 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뒷 장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즉, 교사의 전문성에 대해 생각해볼 때 현재 학교에서는 교사에게 부당하게 학교 폭력과 인성교육에 대한 책임을 지우고 있는 한 편, 심도있게 실시되어야 할 진로교육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담가나 경찰의 역할을 교사에게서 거두어 가는 대신, 진로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요구해야 합니다.
성직관의 경우,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가질수는 있겠으나 사회나 학생, 학부모가 이를 교사에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성직자 이외의 다른 어떤 직업도 희생과 사랑을 요구받지는 않습니다. 교사는 성직자가 아니므로 인류애를 실천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목사나 신부, 수녀, 스님들에게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희생과 사랑을 교사에게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교사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태도는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고, 인격을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교사는 부모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닙니다. 상담가나 경찰, 보모의 역할까지 모두 교사가 할 수는 없습니다. 흔들리고 있는 학교가 바로서고, 교사의 권위가 존중받으려면 교사에게 명확한 전문성을 요구해야 합니다. 하는 일도 애매모호하고, 사회적 요구도 애매모호하며, 책임도 애매모호해서는 안 됩니다. 교사는 교과 지식과 학생의 진로 진학을 돕는 교육전문가이어야 합니다. 학생만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교육컨설턴트 역할도 해야 합니다. 누구보다 교과 지식에 대해 해박하여 수업을 할 때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어야 하며, 학생이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미래의 직업을 준비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들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의 가장 큰 기능인 ‘배움의 기능’은 교사가 ‘명확한 전문성’을 제대로 발휘할 때 바로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