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의 노을
오후 7시 40분. 근래 본 하늘 중에 가장 아름답다. 예쁘다, 멋지다라는 단어로는 표현이 안 된다. 나는 압도됐다. 어쩐지 침실 창가로 비치는 빛이 심상치 않다 했다. ‘오늘 노을이 꽤나 힘 있나 보구만’ 하며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 종이박스 더미를 버리러 내려갔다가 깜짝 놀랐다. 쓰레기를 얼른 치워두고서 홀린 듯이 하늘이 가장 잘 보이는 주차장 구석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불타는 것 같다. 지옥 마냥 타오르는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천국에 훨씬 가까울 것이다. 가까운 쪽은 보라색 물감이 두껍게 뭉친 구름들 사이로 번지고, 먼 쪽으로는 오렌지빛이 실크처럼 퍼진다. 눈앞에 드넓게 펼쳐진 비현실적인 풍광을 내가 사는 현실과 이어주는 건 응암동의 낮은 빌라 지붕과 교회 십자가, 이름 모를 산등성이, 송전탑 같은 것들. 한쪽에 창문을 열어 놓고 세워 둔 롯데택배 차에서는 라디오를 크게 틀어놨다. 때마침 루시드폴의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가 들린다.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 덧문을 아무리 닫아 보아도 / 흐려진 눈앞이 시리도록 날리는 기억들”
휴대폰이 없어서 눈으로만 열심히 담았다. 라디오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속으로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사진 찍지 않아도 좋다,라고 생각했다가 이왕이면 사진도 찍자, 싶어서 집에 들어가 휴대폰을 갖고 나왔다. 습도가 엄청 나서 팔이 끈적거리고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이에 모기를 물린 것 같다. 하지만 조승연 작가의 말처럼 낭만은 일정 정도의 낭비를 동반하는 법이고, 그 낭비로 인해 이따금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때도 온다. 지금이 그때다. 이 정도 낭만을 위해 이 정도 희생이면 몇 번이고 더 할 수 있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영상으로도 담았다. 마침 비디오를 누르려할 때 매미 소리 데시벨이 확 커져서 더 생생한 장면이 담겼다.
모두들 지금 이 하늘을 한 번이라도 올려다보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우와’ 소리에 잠시나마 사소한 걱정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존재를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풍경이 나보다 앞에 있는 순간은 흔하지 않다. 있을 때 잡아야지. 계속 잡고 잡아서 나보다 멀리 있는 풍경을 만날 때도 그 뒤로 순식간에 숨어들 수 있으면 좋겠다. 정혜윤 PD가 존 버거의 입을 빌려 말한 것처럼, 나에게 붙잡혀 있지 않고 나를 기꺼이 잊어버리는 순간을 자주 갖고 싶다.
그나저나 이 아름다운 하늘도 결국 폭풍전야일 것이다. 태풍이 무서운 기세로 북상 중이라는데 부디 별일 없었으면 좋겠다. 바람도 좀 약하게 불고, 비도 좀 적게 내리고, 이왕이면 습도도 좀 떨어지기를.
2023.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