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2월 4일 일요일
참! 나는 별 수 없나 보다. (11월) 28일날 (일기를) 쓰고 쓰지 않은 걸 보면. 참 한심하다. 몇 번이나 계속 써야지 아니면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써야지 했지만 그게 맘대로 되지 않는다. 참. 아빠가 대만에 가신 지 꼭 1주일이 된다. 11월 27일날 자유중국(대만)에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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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차 장사를 접고 어느 기업의 사장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아빠는 길눈이 밝아 지도가 없어도 낯선 길을 잘 다녔고, 운전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니 기능적으로는 딱 맞는 일자리였을 거다. 하지만 아빠는 남과 잘 지내다가도 상대가 조금이라도 아빠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면 화를 참지 않았다. 울그락불그락 얼굴을 구기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때론 큰 소리로 따지기도 했다.
그런 아빠가 사장의 운전기사라니. 요즘 갑질 뉴스가 화제가 될 때면, 콩코드 승용차를 모는 아빠는 어땠을지 상상하게 된다. 이때 아빠는 늘 깔끔한 복장을 하고 출근했다. 부모님의 다툼도 잦아들었다.
그 사장은 1년 동안 대만 출장을 가게 되어 있었다. 아빠도 운전기사로서 함께 가는 조건으로 취업을 한 터였다.
아빠가 출국하기 전날, 집에서 다 같이 저녁을 먹는데 나는 눈물이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했다. 싹싹하고 똑똑하고 상냥한 언니가 아빠에게 큰 지지와 응원을 받은 것과 달리 아빠는 나를 썩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사사건건 내 고집을 꺾으려 했다. 성격과 기질에 외모까지 자신을 쏙 빼닮은 자식에게 자신을 투사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아빠는 내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게 틀림없다. 나를 힘들게 하는 아빠를 나는 미워했고, 아빠가 없을 때에야 크게 숨을 쉬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는 어렸지만, 웬만해선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빠의 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대답을 늦게 하거나 잘못을 빌지 않는 방식으로 나름의 ‘반항’을 했다. 그런 내가 왜 이렇게 우는 건지, 울면서도 알 수 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그러고도 한참 후 엄마의 이야기에서 어렴풋이 눈물의 근원을 짐작해 보았다.
아빠는 1980년부터 1981년 사이 1년 동안 쿠웨이트에 건설 노동자로 다녀왔다. 아빠는 내가 태어났을 때 나를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을 만큼 예뻐했다고 한다. 하도 물고 빨고 하는 통에 곁에서 지켜보던 언니는 퇴행으로 잘 가리던 변을 못 가리게 되었을 정도였다. 세 살 때 아빠는 쿠웨이트로 떠났고, 나는 며칠 동안 큰 소리로 울었다. 그러니까 아빠는 한때 나를 너무나 사랑했고, 나는 그에게서 안락하고도 큰 사랑을 받았다는, 기억할 수 없고 믿기도 좀 어려운 전설 같은 이야기.
그와 다시 한번 긴 이별을 앞두고 어쩌면 머나먼 시절 경험한 이별이 무의식에서 되살아났던 건 아닐까. 아무튼 그날의 눈물은 지금도 미스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