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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혜진 Oct 22. 2023

아빠가 대만에 가셨다


1988년 12월 4일 일요일
참! 나는 별 수 없나 보다. (11월) 28일날 (일기를) 쓰고 쓰지 않은 걸 보면. 참 한심하다. 몇 번이나 계속 써야지 아니면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써야지 했지만 그게 맘대로 되지 않는다. 참. 아빠가 대만에 가신 지 꼭 1주일이 된다. 11월 27일날 자유중국(대만)에 가셨다.     


*     


아빠는 차 장사를 접고 어느 기업의 사장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아빠는 길눈이 밝아 지도가 없어도 낯선 길을 잘 다녔고, 운전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니 기능적으로는 딱 맞는 일자리였을 거다. 하지만 아빠는 남과 잘 지내다가도 상대가 조금이라도 아빠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면 화를 참지 않았다. 울그락불그락 얼굴을 구기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때론 큰 소리로 따지기도 했다.     


그런 아빠가 사장의 운전기사라니. 요즘 갑질 뉴스가 화제가 될 때면, 콩코드 승용차를 모는 아빠는 어땠을지 상상하게 된다. 이때 아빠는 늘 깔끔한 복장을 하고 출근했다. 부모님의 다툼도 잦아들었다.     


그 사장은 1년 동안 대만 출장을 가게 되어 있었다. 아빠도 운전기사로서 함께 가는 조건으로 취업을 한 터였다.      


아빠가 출국하기 전날, 집에서 다 같이 저녁을 먹는데 나는 눈물이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했다. 싹싹하고 똑똑하고 상냥한 언니가 아빠에게 큰 지지와 응원을 받은 것과 달리 아빠는 나를 썩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사사건건 내 고집을 꺾으려 했다. 성격과 기질에 외모까지 자신을 쏙 빼닮은 자식에게 자신을 투사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아빠는 내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게 틀림없다. 나를 힘들게 하는 아빠를 나는 미워했고, 아빠가 없을 때에야 크게 숨을 쉬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는 어렸지만, 웬만해선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빠의 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대답을 늦게 하거나 잘못을 빌지 않는 방식으로 나름의 ‘반항’을 했다. 그런 내가 왜 이렇게 우는 건지, 울면서도 알 수 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그러고도 한참 후 엄마의 이야기에서 어렴풋이 눈물의 근원을 짐작해 보았다.


아빠는 1980년부터 1981 사이 1 동안 쿠웨이트에 건설 노동자로 다녀왔다. 아빠는 내가 태어났을  나를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을 만큼 예뻐했다고 한다. 하도 물고 빨고 하는 통에 곁에서 지켜보던 언니는 퇴행으로  가리던 변을  가리게 되었을 정도였다.    아빠는 쿠웨이트로 떠났고, 나는 며칠 동안  소리로 울었다. 그러니까 아빠는 한때 나를 너무나 사랑했고, 나는 그에게서 안락하고도  사랑을 받았다는, 기억할 수 없고 믿기도 좀 어려운 전설 같은 이야기.


그와 다시 한번 긴 이별을 앞두고 어쩌면 머나먼 시절 경험한 이별이 무의식에서 되살아났던 건 아닐까. 아무튼 그날의 눈물은 지금도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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