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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혜진 Jan 26. 2024

쓸 수 없는 이야기는 없다

갱년독서 1. 사건 / 아니 에르노 / 민음사

“뭔가 잘못되었네요. 태아가 제대로 자라지 않고 있어요.”


초음파 화면을 보던 의사가 말했다. 나는 임신 14주 차 정기검진을 받던 중이었다. 어리둥절한 내게 의사는 머리둘레와 몸길이를 설명하며 중절 수술을 권했다.


“결정하시는 게 좋겠어요. 안 하시더라도 태아가 오래 버티지 못해요. 자연유산이 될 확률이 높아요.”

“그럼 자연유산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 어떨까요?”

“아마 몇 주 동안은 임신 상태가 이어질 거예요. 그동안 아기집이 커지면서 점점 배꼽 위로 올라올 텐데, 산모에게 너무 위험해요. 하루라도 빨리 손을 쓰셔야 해요. 나중에 더 힘들어져요”

“그럼 이제... 수술 날을 잡으면 되나요?”

“아, 저희 병원에서는 ‘그 수술’은 안 해요. 다른 곳에 가셔야 해요.”


10 , 임신중단 수술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자궁  태아가 “잘못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합법적으로  수술을   있는 경우는 의사에게 유산 진단을 받거나, 부모에게 유전적 질환이나 정신장애가 있거나, 강간에 의한 임신  아주 제한적이다.  경우 태아가 ‘잘못되었을  심장은 여전히 뛰고 으니 유산은 아니었다. 유전적 질환의 가능성도 없었다. 법에 ‘임신을 유지하는 것이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라는 조항이 있긴 했다. 당시   상태는 심한 입덧을 빼면  이상 없었고, ‘해할 우려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건 실제로 아주 긴박한 상황에서나   있는 말이었다.


다행히 지인이 그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쪽지를 내 손에 쥐어주며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좋다”고 말했다. 종이엔 수술이 가능한 병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며칠 후 나는 어느 뒷골목의 산부인과 침대에 누워 있었다. 100만 원이 넘는 현금다발은 이미 접수대에 올려놓았다. 진료 카드는 작성하지 않았다. 1인 침대가 있는 작은 방 하나를 배정받았다. 수술을 위해 무언가를 (자궁 입구까지) 밀어 넣은 채 아픈 배를 부여잡고 열 시간 동안 침대를 뒹굴었다.”


수술 후 다섯 달이 지나 쓴 글이다. 더 생생하게 글로 정리하고 싶었으나, 한편으론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한동안 몸에서 피가 계속 나왔고, 오한과 발한을 오가는 몸 상태 때문에 기운이 나지 않았다. 정신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태아가 사라졌다는 상실감 그 이상의, 몹시 불편한 감정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그 병원에 내가 다녀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후유증이 생겨도 병원이나 의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 건강보험을 적용받지 못했고 병원비를 현금으로 준비해야 했던 것 등 내가 겪은 부조리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에도 무력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여성과 의사와 간호사가 내가 겪은 것과 똑같은 일을 경험하고 목격했을 텐데 왜 세상엔 이런 이야기가 없을까. 당연하지. 불법을 저질렀으니까. 답답하고 불쾌했던 이 기분은 2019년 4월 ‘낙태죄 헌법불일치’ 판결을 받은 후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아니 에르노 '사건'


그리고 곧이어 이 일을 다시 바라보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민음사)이라는 책을 읽은 것이다. <사건>은 202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의 작품으로, 작가가 임신 중단을 결심하고 병원을 찾아 수술을 받은 1963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넉 달 동안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작가는 이 책을 35년이 지난 1999년에야 쓸 수 있었는데, 1975년까지 프랑스에서는 임신 중단 수술이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낙태죄 헌법불일치 판결이 난 그해 10월, 그러니까 작가가 책을 쓴 지 20년 만에야 겨우 번역 출간되었으니 책에 대한 두 나라의 사회적 맥락은 비슷하다.


20대 초반, 임신했음을 안 작가는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해 수술을 하기로 결심한다.


“중절하겠다고 생각하며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못 할 일은 아니었기에, 특별한 용기가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평범한 시련이리라 짐작했다. 내 앞을 지나간 수많은 여성들이 새겨 놓은 길을 따라가면 될 듯싶었다.” (23쪽)


그는 “피임의 자유, 가족계획과 관련한 비합법적인 협회의 일원”인 지인을 찾아가고, 도서관에서 관련 책을 찾아 읽는 등 “길”을 찾는다. 그러나 곧 “따라가야 할 길도, 따라야 할 표지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많은 소설들이 임신 중절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 일이 정확하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방식에 대해서까지는 세부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스스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과 이제 더는 임신하지 않은 상태 사이는 생략되었다.” (27쪽)


그는 수술을 경험한 여성을 직접 만나 “자궁 경부에 탐침관을 집어넣고, 유산이 되기만을 기다”(44쪽)리던 중 패혈증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역시 여성과 똑같은 시술을 받으며 “내내 울었다. 계속 아팠고, 배 속에 묵직한 느낌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그가 왜 아팠고, 어떻게 아팠고, 얼마나 아팠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겪은 고통은 바로 내가 겪은 것과 같았다. 다른 점은, 나는 약물을 사용한 덕에 10시간 만에 마취한 상태로 수술할 수 있었고, 그는 닷새 동안이나 탐침관을 넣은 채 생활하다 마지막 날 “고통 속에서 헐떡거리”다가 빠져 나온 태아의 탯줄을 스스로 자르고 “변기 물을 내”려야 했다는 점이었다.




책에서 가장 좋았던 건 수술 경험을 “자긍심”으로 해석한 부분이었다.


“다른 이들은 결코 가려고 하지 않는 곳까지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자긍심처럼 생각되었다. 이런 감정의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이 이야기를 쓰게끔 이끌었다” (75쪽)


수술한 일을 되새길 때 떠오르는 감정이 꼭 죄책감이나 죄의식, 슬픔일 필요는 없다는 작가의 해석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 경우 태아를 잃은 슬픔은 몇 개월 후 다른 색깔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파스텔톤의 잔잔하고 가벼운 애틋함이랄까.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나를 여전히 ‘슬픔을 간직한 여인’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안쓰러운 눈빛, 말 줄임, 이런 것들이 나를 배려하려는 것임은 알았지만 어쩐지 나는 어색해졌고 부자연스러웠다. 이제 괜찮다며 내 상태를 적극 알리려 애쓰다가 나중엔 이마저 피곤해져 그냥 적당히 사연 있는 여자 표정을 보여주며 넘어갔다.


수술을 하고 회복한 경험을 나도 자세히 쓰고 싶었고, 다른 여성들의 유산 경험을 듣고 인터뷰 글을 써 볼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려줄 대상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글을 쓴다고 해도 어떤 반응이 따라올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건> 역시 “출판되자마자 조롱을 받거나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진정한 장소> 72쪽) 아니 에르노가 유명한 작가였음에도, 사회가 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명작가인 내 글은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인터뷰이를 찾더라도 그들의 수고에 보답할 자신이 없어 아직도 보류 상태다.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이후로, 관련 법이 언제 바뀔지 늘 관심을 두고 지켜본다. 5년이 다 되어가지만, 국회 내에서 표류 중이라는 오래된 게시물만 확인할 뿐이다. 사회가 임신중단도 권리라는 걸 받아들여 법 조항이 바뀔 때까지 여성들은 건강보험을 보장받지 못하고 의료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현금다발을 병원 카운터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다. 그들 각각의 사연이 중요할까? 아니. 권리에는 특별한 사연이 필요치 않다.


책 <진정한 장소>에서 아니 에르노는 말한다.


“정말이지 섹스를 하고 임신을 한 것이 왜요? 아니 그것은 여성들의 탓이 아니었어요. 단지 사회의 잘못이었죠. 그 시절에는 여성들에게 해결책을 제공해 주지 않았어요. 사실상 여성들의 자유를 금지한 거죠.”


사회를 이렇게 만든 책임을 모든 성인이 N분의 1로 나눠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다. 더 큰 책임이 있는 이들이 있고 반대로 보상받아야 할 이들도 있다. 각각 권력자와 소외계층이 그럴 것이다. 나는 잘못된 법과 관행의 피해자이지만, 한편으론 경험한 자의 힘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다. 또 내겐 ‘글’이 있다. 나는 지금 글 쓰는 행위로서 내가 지고 있는 책임의 일부를 행하는 중이다. 아니 에르노의 <사건>을 함께 읽자고, 이제 임신중단을 인간의 권리로 받아들이자고, 그리고 국회의원들에게 국회에 계류 중인 관련 법을 통과시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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