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나는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을 무척 부러워 했다.
우리집은 피아노학원을 보내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교길 엄마도 안계신 빈집을 향해 약간은 우울한 맘으로 걷다가, 노란색의 어여쁜 학원가방을 들고 피아노 교습소로 향하는 아이들을 볼때면 내맘은 더 우울해지곤 했다.
교습소에서 흘러나오는 청아한 피아노 소리를 동경했고, '소녀의 기도'같은 유명한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내모습을 그려보기도 했지만 그건 그림의 떡이었다.
하지만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은 학원가기를 지독히 싫어했고 종종 땡땡이를 치기까지 하는걸 보고, 이해도 가지 않았지만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는 피해의식까지도 느끼던 나였다.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고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을때, 나는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로 하고, 피아노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의 월급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생활비를 아껴서 장기 할부로라도 꿈꾸던 피아노를 사겠다는 열망이 박봉을 쪼개 생활비를 줄여야 한다는 걱정보다 컸다.
피아노가 집에 들어오던날, 난 다시 소녀로 돌아간 것처럼 마음이 설레었다.
아이를 피아노학원에 등록시키고 아이가 일주일에 세번 학원에 간 사이 나는 아이가 쓰는 피아노 교본을 놓고서 혼자서 피아노를 배웠다.
학교다닐때 배웠던 음악실력만을 가지고 더듬더듬 악보를 따라가며, 따로 놀아야 할 양손가락이 함께 움직이는걸 원망하면서, 그렇게 난 피아노를 배웠다. 나중에는 내가 쳐보고 싶었던 근사한 곡들도 한달정도 연습하면 제법 연주가 되는걸 보고 어렸을적 꿈이 이뤄진 것 같은 기쁨도 느꼈던 것이다.
아들은 어렸을적 그 아이들처럼 피아노 치기를 싫어하여 얼마 못가 학원을 그만두었지만, 딸아이는 제법 잘 따라갔고, 가끔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선언 했다가도 자기가 못내 아쉬워 교습중단 선언을 철회하고 다시 배우기를 몇번, 6학년때까지 꽤 오래 피아노를 배웠다.
그리고 딸아이는 잠시 시간을 돌아 결국 실용음악을 전공하게 되었다. 나의 그 피아노 때문이었을까...
재취업한 이후로 거의 피아노를 치지 않아,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으면 이제는 또다시 양손가락이 함께 움직인다.
처음 피아노를 들였을 때의 기쁨과 설렘도 희미해 졌고, 딸아이는 전자악기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피아노는 이제 딸아이의 방 한켠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물건을 올려놓는 용도의 커다란 탁자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몇번인가 중고매매상을 통해 처분하려고 하다가 바빠서, 아쉬워서, 귀찮아서 계속 미루고 있었다.
얼마전에도 갑자기 피아노를 처분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인터넷을 뒤져 가격을 알아보고 별짓을 다하면서도 정작 전화를 하지않고 있었는데, 오늘 문득 내맘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저것은 나의 피아노라고.
생활비를 쪼개 어렵게,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마련한, 귀여운 나의 아이들을 가르쳤고, 잠시나마 소녀적 나의 꿈을 이룰수 있게 해준 나의 피아노라는 것을. 그래서 아직 나의 손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번에 난, 팔아버릴 생각은 앞으로 하지 않기로, 사정이 된다면 이 아이와 되도록이면 오래 함께 해야겠다는 맘을 굳히게 되었다.
앞으로 좀더 자주 열어줘야겠다.
물론 이웃들에게는 좀 폐가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