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추돌사고를 겪었다.
내 차는 신호대기 중이었고, 뒷쪽에서 충격이 2번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2번째 차량은 내차 뒤를 충격하고 내차와 붙어 있었고, 3번째 차량은 2번째 차량과 약간 떨어져 있었는데, 2번 차량의 뒷부분과 3번 차량의 앞부분이 많이 파손되어 있고, 2번 차량과 붙어있는 내 차는 상대적으로 뒷범퍼 부분의 약간의 손상이 있었다.
멍청한 2번차량 운전자가 사진을 찍기도 전에 차량을 후진하여 사고현장은 보존되지 못했고 나는 그를 핀잔하였다. 운나쁘게 내차의 블랙박스에는 사고현장이 녹화되지 않았고, 2번차량에는 블랙박스가 없었으며, 3번차량의 블랙박스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출동한 보험회사 직원에게, 내차에 2번의 충격이 가해 졌는데 두번째 충격이 더 컸다고 하면서 2번 차량이 먼저 내차를 추돌하고 3번 차량이 그 뒤를 추돌한 것 같다고 진술하였다.
잇따라 출동한 다른 차량의 보험회사 직원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차는 과실이 없다하고, 2, 3번 차량 중 가해차량이 정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내 진술이 2, 3번 차량 중 누가 가해자 인지를 판명하는데 중요한 일부인 듯 하다. 부담스럽다.
3번 차량의 블랙박스를 보고난 직원들이 3번차량이 첫번째 추돌자, 즉 1차 가해차량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사고 직후 차량이 배치된 모습을 보더라도 그게 정황상 맞는것 같다고 한다.
갑자기 머리가 멍해진다. 내 기억으로는 난 두번 부딪혔는데... 나의 기억이 의심스러워 지기 시작하고, 사고 직후 2번 차량이 내차에 붙어 있었던 점과, 차량의 파손 정도를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르고, 급기야 내가 첫번째 충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2, 3번 차량이 추돌하는 소리였으며, 두번째 충격이 2번차량이 3번 차량으로부터 밀려와 내차를 추돌해서 생긴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의 기억이란게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법률사무소에 다년간 근무하면서, 시시비비를 가려 달라고 죽자사자 덤벼드는 의뢰인들을 떠올린다.
의뢰인이 원고인 경우(특히 이혼사건) 의뢰인의 사정을 들어보면 상대방은 세상에서 제일 나쁜 인간이다.
그렇게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소장을 접수하면, 소장을 송달받은 상대방은 답변서 등의 반박서면을 제출하는데, 그것을 받아 본 후 나는 우리 의뢰인으로부터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오고가는 반박 서면을 통해 사건은 진흙탕 싸움으로 점철된다.
사무실에서 변호사님과 직원들은 종종 상대방의 서면을 받아보고 우리 의뢰인에게 당한 배신감으로 혀를 내두르면서,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느 누구도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거짓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사람들은 또한 자기합리화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내가 차량에 블랙박스를 달게 된건, 사고처리 뿐만 아니라 보험사기 자해공갈단들의 만행이 무서워서였다.
나는 휴대폰, 블랙박스, 컴퓨터, CCTV 등 각종 디지털 첨단기계들이 부담스러운 세대에 속하고, 나 자신도 이런 문명의 이기들에게 인간이 종속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워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기계들의 편리함을 부정할 수 없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인간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는 편이다.
어쨌든 나는 블랙박스가 왜 세상에 나오게 됐는지 몸으로 깨달았다. 먼 미래에는 비도덕적인 인공지능이 만들어져 인간을 지배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과 비도덕적 행동을 보완해 주는 것으로 그 가치를 평가하면 될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