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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May 01. 2024

재쇄하는 마음

독립출판 제작자의 고백

책을 재쇄했다.


재고가 떨어지면 당연히 재쇄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이 망설였다. 개인이 감당하기에 결코 적지 않은 돈을 다시 써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책이 이렇게 팔리는 걸 보고도 재쇄를 단행해도 좋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책의 가치는 나를 대변할 때도 있어서 스스로를 창작자라 부르는 것을 허용해도 좋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고민에 지쳐 있을 때쯤, 오래전에 보냈던 입고 요청 메일에 답장이, 출판물 유통 플랫폼에서 추가 입고 요청이, 꾸준히 거래하던 서점에서의 재입고 요청이 순서대로 들어왔다. 연속된 기쁨에도 안주할 수 없어서 속으로 기도를 했다. '제가 지금부터 판매 관리자 사이트에 로그인할 건데, 만약 한 달 매출이 딱 1부라도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재쇄하고, 창작 활동도 이어가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 안고 해당 월의 판매 부수를 확인했다. 딱 1권이었다. 허탈함에 웃음이 났다. 하지만 나는 '요즘의 나' 답게 결정을 며칠 더 미뤘고 다른 한 곳에서 10부 재입고 요청을 받고 나서야 인쇄소에 파일을 넘겼다. 책이 출고된 날은 공교롭게도 4월 23일 세계 책의 날이었다.



독립출판하는 사람에게 책을 두 번 찍는 일은 흥분과 동시에 염려를 가져온다. 초판본을 1천~2천 부 인쇄하는 기성출판 세계와 달리 겨우 몇백 부를 소량 인쇄할 뿐이지만(어떤 독립출판 제작자는 몇천 부씩 하기도 한다) 나의 힘으로 보유 재고를 '0'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쾌감을 선물한다. 단조롭던 일상에 새로운 출구가 생긴 기분이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정말로 해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양된다. 갑자기 죽어 있던 창의력이 솟아나면서 재쇄 아이디어는 물론 새 책에 대한 구상까지 하기 시작한다. 살아 있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작업실이나 사무실이 없다면 보통 본인의 집에 책을 보관할 텐데, 그러면 어느 한쪽에 최소 수십 부에서 수백 부에 달하는 책을 쌓아두고 지내야 한다. 재고를 매일 끌어안고 사는 일은 때때로 자아를 뒤흔든다. 나는 누구인가부터 시작해서 나는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등을 생각하게 된다. 어쩌다 가족 구성원이 책 박스를 보기라도 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몇 다리 건너의 누구 씨가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원고 쓰는 일에만 몰두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강연 장소나 인터뷰 장소에 있는 사진을 보기라도 하면 애꿎은 재고 박스를 쳐다본다. 그리고 무감할 줄 모르는 자신을 탓한다. 비교되는 마음 자체를 못 느끼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냐는 반문을 곁들여서.



단숨에 5쇄 혹은 10쇄까지 진행한 책들을 쳐다보다가 내 책을 짓기로 한 첫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었고, 나처럼 아파하는 사람도 많다는 말을 듣고 먼저 연약함을 고백해 보기로 했다. 좋은 선택을 했다고 칭찬해 주는 사람이 늘어났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길 바란다는 응원의 말도 더해졌다.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위로를 받았다고 연락해 오는 낯선 이들도 생겨났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 속 주인공이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읊조렸던 말을 떠올려본다. '난 무엇을 기대했나'. 독립출판을 한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기억들을 매만지며 스스로 대답해 본다. 이런 추억이 쌓여 가는 일만으로 충만할지도.



재쇄한 책은 가제본 제작 단계에서 기획했던 코팅 없는 책으로 인쇄를 진행했다. 물리적으로는 더 연약해졌지만 덕분에 책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색감과 질감이 완성됐다.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책은 나를 닮아 연약하니까. 표지에 붙일 사진은 필요한 분량만 우선 인화하기로 하고, 곧 생일 쿠폰이 나오니까 그때 더 주문해서 몇 푼 아끼기로 결정했다. 그 사이 책을 파는 1년 동안 알게 모르게 찍어 둔 화요일의 사진들을 고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택배로 물건을 받고 나니 망설였던 시간이 무색하게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입력된다. 



재쇄하는 마음의 끝은 책임감이 아닐까. 흥분과 염려를 지나, 다시 같이 살아가기로 결정하고 나니 책임질 방법을 궁리하게 된다. 책의 겉면을 매만질수록 무거운 마음이 손끝에서 폐부로 스며드는 기분이다. 이것들과 이별하는 날은 언제가 될까. 섭섭할지언정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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