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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태주 Mar 06. 2021

순수의 시대

그리움의 문장들



나는 스무 살 때 연상이 좋았다.

살다 보면 남에게 어깨를 빌려줘야 할 때가 있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가거나 기차 여행을 할 때

옆자리에 앉은 묘령의 여자가 기대어오면.

비록 알지 못하는 사이더라도 같은 시대의 고단한 삶을 건너는 동시대인으로서

기꺼이 어깨 한쪽을 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기차 안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녀는  옆자리에 앉아서 책을 꺼내 들었다. 언뜻 표지를 훔쳐보니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살폈다. 열댓 살쯤 연상으로 보였다. 지적이고 음전해 보였다. 블라우스 빛깔이 목련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서,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애잔하고 진지한 슬픔에 대해서 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눌 준비가  있었다.

그녀는 접어두었던  중간 부분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말을 걸어올 때까지 조정권의 시집, 《산정묘지》를 읽기 시작했다. 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맑은 손가락만 눈에 들어 왔다.




  분쯤 지났을까.  왼쪽 어깨 위로  수국 꽃더미 같은  와락 쏟아졌다. 나는 숨을 참고 가만히 있었다. 잠깐 어깨를 내주고 그걸 핑계로 그녀와 하루키를 얘기하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수국이 계속 무너져 내렸다. 나는 화장실에도  가고, 눈송이처럼 가벼웠던 것이 수박덩이처럼 점점 무겁게 짓눌러도 참았다.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하루키 대신 어깨를 빌려줬다. 가볍게 코까지 골며 옅은 파운데이션을  와이셔츠에 묻히며 고단하게 잠든 동시대인을 위해,  이름 모를 연상의 여인을 위해.




나는  이후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가방에서 책을 꺼내거나 펼치면 잔뜩 긴장하고 경계한다.  셔츠는 낯선 이의 흔적에 취약하다. 수국은 꽃밭에 있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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