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림태주 Mar 06. 2021

가족의 정의

그리움의 문장들



욕실 헤어드라이어의 줄이 꼬여 있을 때 플러그를 빼 풀어 두는 것. 내가 설거지를 하지 못하더라도 밥그릇에 남은 밥풀이 말라 달라붙지 않도록 물을 채워 개수대에 놓아두는 것. 머리를 감고 수건을 두르고 나올 때 수건걸이에 새 수건을 꺼내 걸어두고 나오는 것. 치약이 떨어지고 화장지가 떨어지면 새것을 꺼내 바꿔두고 나오는 것. 화장실 휴지통이 가득 부풀어있을 때 엄마를 부르기 전에 새 비닐봉지를 먼저 부르는 것. 세탁기 정도는 스스로 돌릴 줄 아는 것. 벗어놓은 양말과 빨랫감들이 방바닥이 아니라 세탁바구니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 수챗구멍을 막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담아 고인 비눗물이 잘 빠져나가게 해 주는 것. 누군가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연속극 소리나 음악 소리가 거실을 뛰어다니지 않게 죽여주는 것.




아직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짜증내는 대신 혼자 저녁을 차려 먹고 설거지를 해두는 것. 방바닥에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거나 옷장 속에 들어가 있을 때 그게 신데렐라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누군가의 식사량이나 웃음의 양이 줄어들 때 그것을 알아채는 것. 웃음이 줄어든 대신 근심과 외로움의 양이 늘지 않도록 마음의 눈금을 세심히 살펴주는 것. 아프게 말하고 몰라주는 말을 하는 때가 있더라도,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끝까지 믿어주는 것. 다투었더라도 마주 앉아 밥을 나누고 서로의 물잔에 물을 채워주는 것. 빗소리 뒤에 숨어서 한숨을 내쉬는 엄마가 보이거나 자주 창밖의 석양을 내다보는 아빠의 등이 보일 때, 그분들의 인생을 헐어내며 내가 살아왔다는 걸 고요히 생각해 보는 것. 




세상이 용서하지 않는 죄일지라도 기꺼이 용서하고 안아주는 곳.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는 곳. ‘우리’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곳. 나를 넘어 세상으로 가는 길이 시작된 곳. 신이 다 돌볼 수 없어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곳. 하나가 없으면 전부가 없는 곳.



매거진의 이전글 순수의 시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