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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태주 Sep 29. 2021

죽이지 않는 오징어 게임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그때 우리는 오징어 모양을 땅바닥에 그려놓고 수레미 놀이라고 불렀다. 일제 강점기 때도 아이들이 했던 놀이여서 왜색 짙은 용어로 불렀으리라 추측된다.


아무튼 지금 내가 그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다면 456억 원은 따 놓은 당상이다. 나는 우리 고장이 배출한 놀이의 신이었으니까. 사각형 안으로 공격자들이 들어오면 선 밖으로 밀쳐내 죽여야 하는데 나는 그 아이는 죽일 수가 없었다. 죽이는 게 마음 아파 자꾸 그 애를 살려 보냈다. 그러다 눈치를 챈 같은 편 아이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그래서 나는 전략을 바꿨다. 한 번은 죽이고 한 번은 살리고, 이런 식으로.


그 아이 이름은 민숙이었고, 나는 걔를 슈가(숙아!)라고 불렀다. 부르기만 해도 메밀꽃 흐드러지듯이 희고 달달했다. 나보다 두 살 어렸고 동네에서 제일 예뻤다. 읍사무소 다니는 슈가 아빠도 나에게 다정하게 대했고, 슈가 엄마는 더 할 수 없이 인자하고 고왔다. 내가 장모님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됐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사람이 슈가 엄마였다. 아무튼 우리가 오징어 게임 같은 건 시시해서 더 이상 하지 않을 만큼 자랐을 때, 내 마음 속의 슈가도 그만큼 자라 있었다.


내가 남고에 입학하고 그녀가 여고에 입학하고부터는 골목에서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못 보는 날이 길어지면 괜히 입맛이 없고 공부가 안 되고 인생이 괴롭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머리도 굵어졌고 엉뚱한 놈이 채갈 수도 있으니 이젠 용기를 내 고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는 고백을 주로 편지로 했고, 나는 편지 쓰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도 한 편 썼다.


문제는 그 편지를 누구를 통해 전하느냐였다. 내가 떠올린 매파 역은 슈가의 큰언니였다. 그녀는 나보다 세 살 위였는데 나에게 무척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해줬다. 그녀가 읽는 책들도 내 취향과 맞았다. 내가 읽은 알퐁스 도데의 <별>이나 <데미안>의 아브락삭스에 대해서 그녀와 얘기를 나눌 때,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도 좋았지만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녀의 남자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나는 늦은 봄밤에 슈가 언니에게 편지를 건넸다.

“누나, 이것 좀 민숙이 한테 전해주세요.”

“이거 연애편지니?”

“아니에요. 열어보면 안 돼요.”

“열어보지 말라니까 더 궁금한데. 하하하.”

“정말 보면 안 돼요. 그럼 누나 다신 안 볼 거예요.”

“태주 넌 나를 믿니? 정말, 나를 믿어?”

“네?”


나는 그녀가 나를 믿느냐고 묻는 말이 내 마음을 믿느냐는 말인 줄 몰랐다. 그 말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순진하게 슈가의 답장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은 무서운 말이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새로 나온 에세이에 있어요. 지금 서점에서 절찬리에 판매한다고 하네요.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너는 당신에게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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