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성을 다녀와서
둘째 왕자가 지키던 사비성이 끝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결과를 미리 예상하고 웅진성으로 몸을 피했으면서도, 막상 사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패잔병들을 모아 후일을 도모 한들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하는 싸움은 승산이 없었다. 차라리 항복을 하면 사직은 보존할 수 있지 않을까? 연합군의 실권은 당의 소정방에게 있지 않은가?
당으로서는 백제의 패망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신라의 세력이 커지는 것 또한 그들이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삼국이 고만고만한 세력으로 남아서 자기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조공을 받치는 것을 꿈꿀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사비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패망을 모면하고 기회를 엿보면 국운융성의 기회는 다시 찾아 올 것이다. 서기 660년 음력 7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18만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부터 함락 위기에 놓인 사비성을 탈출하여 웅진성으로 도피한 의자왕은 닷새 만에 사비성으로 돌아가 항복하였다.
하지만 의자왕의 바램과는 달리 700년 역사의 백제는 패망하고 말았다.
1400여년이 흐른 2014년 봄, 패망한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사비성에 11살인 딸과 함께 섰다.
부여의 부소산성이다.
백마강 자락에 위치한 그리 높지 않은 산, 기구한 역사가 없었다면 여느 고장의 뒷산으로 여겼어도 무방할 그런 곳이다. 현지 주민들에게는 아침 저녁으로 산책하기 좋고 공기 좋은 그런 곳이겠지만, 여행객들에게는 슬픈 역사를 가진 곳으로 방문되어지는 곳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따라 걸으니 제일 먼저 삼충사가 나왔다. 백제의 세 충신 성충*흥수*계백을 기리는 사당이다. 의자왕에게 충언을 한 죄로 옥에서 굶어 죽은 성충의 이름을 볼 때마다 조선 단종 때의 충신 성삼문이 떠오른다. 사실 성충의 성은 부여씨로 추정되지만 이름의 어감이 비슷하고 삶의 괘적이 비슷해서인지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고지식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난세에는 이런 고지식함이야 말로 죽음에 당당히 맞서는 용기의 근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상하게도 내가 아는 '성씨' 성을 가진 이들은 하나같이 고지식한 면이 있다.
산 정상쪽으로 한참을 걸으니 부여읍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반월루(半月樓)가 나왔다. 반달 모양이란 뜻으로 백제시대 사비 도성이 둥글게 휘어진 반달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부소산을 원을 그리며 한 바퀴 정도 돌았을 즈음에는 배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소나무 사이로 백마강이 보였다. 바위절벽 위에는 삼천궁녀의 전설이 서려 있는 낙화암이 있다. 고대에 '삼'이라는 숫자는 다분히 많다라는 의미를 함축하여 쓰였기 때문에 '삼천궁녀'는 '삼천명의 궁녀'가 아닌 '많은 궁녀'로 해석해야 맞다고 한다.
수도가 함락되면서 적군에게 쫓긴 산성 내의 수 많은 여인들이 모욕을 피해 부소산 정상으로 도망쳤고 급기야 벼랑 끝에 내몰리자 백마강으로 뛰어내리지 않았겠는가? 그 바위의 본래 이름은 타사암인데 후에 낙화암으로 변했다고 한다.
배고프다는 딸의 하소연에 산을 내려오며 길목에 자리 잡은 매점에서 컵라면을 샀다. 먹고 간다는 우리의 말에 점원으로 보이는 할머니께서 신김치를 써비스로 주셨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백제는 패망하기 직전까지 약 100년 동안 신라와 대립상태에 있었다. 특히 의자왕은 대표적인 정복군주로 제위기간 중 광개토태왕보다 더 많은 성을 함락시켰다.이 과정에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을 죽이는 일도 있었으니 김춘추의 입장에서는 백제라는 나라가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은 나라였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군에 의해 패망한 백제의 문화와 역사는 상당부문 왜곡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지금도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올 만큼 백제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으로 달라지고 있다.
동북아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찬란한 문화유산은 지금도 땅속에 묻혀 있으면서 후손들이 꺼내 주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올 봄, 그 찬란한 백제문화가 숨쉬었던 현장에 잠시 머물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