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베르의 ‘나의 마지막은, 여름’을 읽었습니다.
나의 첫 직업은 방송작가였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새벽 퇴근과 철야, 극한의 업무환경 속에서 일 년을 버텼다. 그 기간 동안 스스로 신기해 할 정도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운동 하나 하지 않았고 영양제를 잘 챙겨 먹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후 이직한 회사는 그만큼의 강도는 아니었지만, 역시 야근을 밥 먹듯 하고 간간히 철야도 있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도 나는 내 체력을 믿고 몸빵을 했다. 그러다 난 결국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병원 생활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중단됐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 대신 내 팔에 주사를 꽂으러 올 간호사를 기다렸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머리도 못 감았고, 병상 외에는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내 몸은 병원 침대 위에 고이 놓여있었지만, 정신만은 적응하지 못했다. 마치 낯선 외국에 뚝 떨어진 듯, 전학 간 첫날인 듯.
루게릭 진단을 받고 안락사를 선택하기까지의 자신의 감정을 담고 있다. 난 이 책을 병상에서 읽었다. 먼 나라 프랑스에서, 그것도 들어보기만 했던 루게릭이란 병에 걸린 저자는 나와는 동떨어진 사람이다. 그런데도 난 이 책을 읽고 침대를 두르고 있는 얇은 커튼 뒤에 숨어서 끅끅대고 울었다.
저자와 나의 하나의 공감대는 낯섦이었다. 몸의 배신, 내 뜻대로 누구보다 충실하게 움직이던 몸이 나를 배신했다. 분명 내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지만, 내가 이해하기도 전에 몸은 멋대로 망가지기 시작한다. 내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없다. 심지어 이 이해할 수 없는 병은 나를 평범한 일상에서 뚝 떼어서 미지의 세계에 나를 떨어트렸다.
저자는 이 낯섦을 놓치지 않고 기록한다. 미디어에서는 시한부에 대한 일방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시한부’라는 단어는 충격, 눈물이 넘쳐나는 장면들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한다. 누군가 극적인 드라마를 떠올리며 책을 집어 들었다면 조금은 실망할 수 있겠다. 저자는 지극히 일상적이며 개인적인 경험을 기록한다. 그 문장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건강하던 때의 기억들과 지워져가는 감각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 친구들과 포옹하던 촉감, 맨 발로 디뎠던 모래사장의 까슬함, 새벽하늘에 아스라한 별 빛들. 생의 마지막에서 바라보기에 더 찬란하다.
대략 20년 동안 혼자 감았던 머리를 엄마가 감겨준다는 게 어딘가 창피하기도 했지만, 내 마음대로 벅벅 감을 수 없어 아쉬운 맛이 남았었다. 하루에 한두 번씩 매일 하던 그 행위조차 그리운 감각이 될 줄 몰랐다. 입원하기 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워서 어쩔 줄 몰라했었기에 평범한 일상이 돌아가고 싶은 곳이 됐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었다. 나에게 당연한 일상과 관계들, 그게 더 이상 당연해지지 않을 때 느끼는 그리움은 너무나 깊은 것이었다.
저자는 마지막은 마지막이란 이유만으로 특별해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것이 마지막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맞게 된다. 마지막이란 이유 만으로 우리의 영혼을 흔들고 심장이 터져나가는 흥분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담담하게 미적지근하면서도 어딘가 서운하게 지나간다.
지구에서 바라본 별의 빛은 이미 저 먼 우주에서 사라진 별의 장렬한 불꽃이라고 했다. 이 책을 설명하기에 좋은 이야기인 것 같다. 패배가 정해진 대결. 꺼져가는 생명력 앞에서 오히려 자아는 생생히 살아 욕망을 이야기한다. 작가의 세계는 죽어가는 별처럼 타오른다. 생의 감각은 저물어 가지만, 나대로 살다가 나대로 가겠다는 신념만은 살아있다. 작가의 생명은 이 책의 마지막 장과 함께 멈추지만 그녀가 불태운 생에 대한 열정과 신념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게 빛난다.
나는 욕망 없이는 살 수 없다. 반가운 침묵이 욕망을 잠재우고 마비시키며 결국은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나는 손을 놓는다. 문자 그대로 의미로도 그렇고, 비유적인 의미로도 그렇다. 나의 실존적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안 베르 <나의 마지막은, 여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