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희수 Nov 02. 2019

내 접시 푸르게 푸르게.

3개월 채식 초보의 후기.

처음 채식을 시작한 건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였다. 되는대로 아무거나 먹고 살다 간 단명할 것 같아 이것저것 찾아보기 시작했다. 채식주의를 접하며 우리가 먹는 고기, 우유, 달걀이 동물을 착취하는 구조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숨 쉬는 생물을 자본주의 구조 속에 억지로 끼워 넣어 고기로 만들어 낸다. 항생제 같은 약품을 잔뜩 먹고 자란 동물은 잔인하게 죽어서 식탁에 올라간다. 이 고기는 살아있던 동물이란 걸 잊게 하기 위해 잘 포장되어 마트에 진열된다. 언제부턴가 고기를 먹는 일이 꺼림칙해졌다.


난 비건은 아니다.


심지어 가끔 닭고기도 먹는다. 이미 소, 돼지고기 정도만 안 먹어도 불편했다. 감히 비건은 시도할 생각도 못했다. 최근에 비건 식당이 많이 생기고 있다지만 가격대가 거의 파인 다이닝 수준이다. 메뉴도 그렇게 다양하진 않다. 게다가 아직 공산품에서 채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집에서 매번 해 먹자니 힘들고 돈도 많이 들며, 기껏 찾아서 외식하면 풀떼기 정도다. 해산물, 달걀, 우유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래도 제도권 내에서 요령이 가능하다. 고기를 안 먹는 정도도 많이 양보한 거다 싶었다.


비건을 하면 불편하다.


이미 고기를 안 먹는다 자체로 외식 메뉴가 많이 탈락된다. 약속을 잡을 때 항상 양해를 받아야 하고, 나와 정기적으로 만나는 지인은 나 때문에 정기적으로 메뉴에 제한을 받는다. 회식은 난이도가 제일 높다. 회사라는 공간에서 개인의 신념을 드러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저 채식해서 고기는 안 먹습니다.’라는 말은 차마 못 했고 그냥 고기를 먹는 척하며 다른 반찬들을 주워 먹고 왔다.


그럼에도 비건을 지향해보려 한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친해지기 위해 질문카드를 했었다. 서로에게 물어보고 싶은 걸 직접 적어서 카드로 만들고 그걸 뽑아서 답변하며 자연스럽게 서로 알아가는 것이다. 이 날 질문카드의 3분의 1 정도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가요?’였다. 음식 취향이 맞는 것만으로 친해진 기분이 든다. 연인 사이에 입맛이 다르면 데이트할 때마다 같이 먹는 게 참 고역일 것이다. 먹는 일만큼 ‘나’를 잘 드러내는 건 없다. 그렇기에 비건을 지향해보려 한다. 더 먹고 싶고 더 맛있는 걸 찾는 욕망을 위해 많은 것들이 희생되고 있다. 비건은 한 사람의 식탁에 무엇이 올라가는지에 대한 문제다. 동시에 그 식탁에 올라가기 위해 고통받는 동물들, 파괴되는 환경, 불평등한 구조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나 하나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다만 채식을 하면서 나는 달라졌다.


채식 생활은 그동안 내가 음식에 집착하고 있었단 걸 알게 해 줬다. 이전에는 먹는 것으로 나를 달랬고 간혹 폭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채식을 하면서 ‘먹는 일’에 대해 신중해졌고 폭식도 자연스럽게 줄었다. 또, 수많은 선택지에서 제한이 생기자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피곤함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제 환경문제와 동물 복지가 남에 일이 아니게 됐다. 도의적으로 환경은 보호해야 하고 동물을 학대하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내 일상 반경에서 무언가를 실천하기에 난 소극적이었다. 기껏해야 텀블러를 가끔 들고 다니고, sns에 나오는 동물 학대범에 분노하는 정도였다. 지금은 먹는 일을 통해 매일매일 내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무언가 실천하고 있다는 건 자신감을 준다. 내가 변한다는 건 세상도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아직 모르는 게 많다.


채식은 사소한 계기로 시작했고, 수박 겉핥기 정도의 지식으로 결심한 거였다. 더 오래 내가 이 가치를 지키며 살기 위해선 공부하고 시도해봐야 할 게 남아있다.


꼭 야채만 먹는 건 아니에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