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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Jan 29. 2022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영화 <봄날은 간다>를 문득 곱씹으며

* 영화 <봄날은 간다>(One Fine Spring Day , 2001)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상대의 뒷모습을 견디지 못하는 여자



여자는 남자의 등 돌려 가는 장면을 못 견뎌, 외려 본인의 등을 보인다. '내가 라면으로 보이냐'며 역정을 내고 남자가 떠날 때. 여자는 그 순간을 견디지 못했다. 잘 때는 물론, 본인이 헤어짐을 말할 때도 늘 여자는 먼저 등을 보였다. 이내 마지막 순간 남자가 눈빛으로 이별을 고하고 등을 보이자 여자는 다시 남자를 부른다.



"상우 씨"



잡으려는 게 아니다. 너의 돌린 등을 내가 견디기 싫어서다. 여자는 남자의 옷을 여며주고 악수를 건넨 뒤, 늘 그랬듯 본인이 등을 돌린다. 그래도 그 마지막 순간 달랐던 건, 그녀가 한번 돌아봤다는 것. 언제나 내 등이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던 남자의 앞모습을 눈에 담아 영원으로 박제한 것이다. 그렇게 여자는 꽃잎이 되어 떠났다.



본인의 머쓱함을 버티지 못하는 남자



숫기 없고 무해해 보이는 이 남자는 초라하고 민망한 자신을 못 버틴다. 그래서 상대방의 거절이 늘 괴롭다. 그것이 나의 무능으로 비롯하였을 거란 생각이 잡초처럼 자란다. 처량한 눈으로 삶의 바람에 휩쓸려 사는 남자는 어쩌면 '사랑'을, 나의 무안을 뽑아내고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은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이고 감정일 뿐. 남자가 술에 잔뜩 취해 마지막으로 여자의 집에 찾아갔을 때, "은수 씨,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까?"하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은 건 그가 정의한 사랑에 대한 최후의 발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안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몸집을 가장 불렸다. 남자는 그때야 깨달았을 테다.


'사랑이 변하네.'


남자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무너졌다. 여자와의 마지막 순간에도 남자는 홀로 남겨진다. 다시 그 눈짓으로. 그때만큼은 처량한 눈을 짓지 않으려 했는데, 이번에도 여자는 무안을 선물했다.



이제 남자가 삶과 나를 버티기 위해선, 마음에 눌어붙어 있는 여자와 함께한 초라하고 찬란한 순간을 모두 떼어 오직 나만의 것으로 만드는 일밖에 없다. 분명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운드 엔지니어인 남자, 그는 그래서 그때의 녹음본을 꺼내어 틀었다. 그리곤 가만히 음미한다. 남자의 텅 빈 눈이 처량하고 초라하다가, 이내 찬란해진다. 우리가 처음 보는 눈으로. 그 순간을 영화는 마지막으로 붙잡아준다. 남자가 소리로 순간을 박제하였듯, 영화는 그 찬란한 눈짓과 표정을 영원으로 박제한다.



애틋한 봄날이 가고 눅진한 여름이 오며 서운한 가을이 가면 적막한 겨울이 온다. 그 시절을 견디고 버텨야 다시 찬란한 봄이 온다. 계절은 어쩌면 삶 속의 작은 윤회 같은 것. 끊어내지 못하면 고통의 챗바퀴를 돌고 돈다. '봄날이 간다'는 말은 아주 먼발치서 '봄날이 온다'는 걸, 우리는 뒤늦게 깨닫는다. 이제 우리는 안다. 이 굴레엔 '나'뿐이라는 것. 잠시 왔다가는 계절에 한없이 흔들리더라도 뿌리는 지켜낼 것.


비로소 오로지 홀로이 감당해내야 하는 계절의 겹. 층층이 쌓인 시절의 나이테가, 바로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아름다와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봄날은 간다, 김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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