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을 통째로 씹어 삼키며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중략)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최진영, 『구의 증명』, 은행나무(2015)
너라는 기억의 몸뚱아리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갉아먹고 뜯어먹고 핥아먹고 빨아먹고 절여먹고 말아먹어야 한다. 그래야 너는 홀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비로소 같이 살아질 수 있을 테니. 너의 존재와 부재를 증명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이 크고도 좀 만한 구球 속에서 아끼는 거 쓸 데 없는 거 다 잃고서 잊고서 모든 게 텅 비어 너와 나만 남았을 때서야 깨끗하게 꽉 찬 사랑의 본질이 육감으로 느껴질 테니. 구球의 밀도를 조절하는 것은 오직 사랑뿐.
'너의 무거운 어둠을 내게 전부 심어줘' (0, 우물)
'피를 좀 더 흘려줘요 내게 침을 뱉어줘요 앓고 있는 병을 내게 옮겨주세요' (백치, 쏜애플)
'그대는 내 혈관의 피 그대는 내 심장의 숨 그대는 내 대지의 흙 그대는 내 바다의 물' (창세기, 9와 숫자들)
최진영 작가는 이 소설을 쓰다 지치거나 불행해지면 9와 숫자들의 '창세기'를 반복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반복해 읽으며 위와 같은 가사들을 떠올렸다. 구와 담 만큼 나도 격앙됐고 끈적한 기억이 떠올라 애먼 부스러기를 털고 있던 걸까. 첫 장을 펴고선 앉은 자리에서 한달음에 꿀꺽 삼켜버렸다.
더부룩한 포만에 속을 쓸며 버스에 타서 구와 담에 관하여 멍하니 생각했다. 담은 구를 씹고 삼키는 데 한참 걸렸겠지. 그것이 오직 담만이 할 수 있는 구에 대한 질긴 애도의 방식이었을 터. 구口라는 수단으로.
구는 천 년을 이야기했지만, 어쩌면 구와 담은 창세기에 만나 사랑하던 사이가 아니었을지 상상한다. 무참한 신은 그들이 온전히 서로를 느끼고 씹어 삼켜 하나의 구球가 됐을 때 다시 둘을 갈라놓고 뿌린 거지.
한 독자가 이런 평을 남겼다.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절절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의 이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과 '이렇게까지 절절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신은 참혹하며 구球는 무심하고 삶은 황폐하여, 우리는 우리를 갉아먹는 곳에 발 붙이고 있으니까.
그럴 수 있다, 다 그럴 수 있다.
구럴 수 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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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 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에야 믿음이란 단어를 갖다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 믿으라. 그러면 말이 된다.'
최진영, 『구의 증명』, 은행나무(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