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한번이라도 정신과를 찾아간 경험이 있는 여성이라면
"엄마와 딸이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난장에서 함께 미쳐 뒹구는 동안, 아빠는 난장의 원인을 제공했으나 그곳에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피해 간다.
...얼마나 많은 폭력이 "사랑이 가득한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가. 또 이렇게 가족 안에서 형성된, 제대로 돌보아지지 않은 상처는 대물림되기 쉽다. 우울증의 가족력이란 비단 유전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151쪽, 158쪽.
정해진 틀, 혹은 정해진 장르 안에서 온전히 풀어내기 힘들다 느껴지는 주제가 있다. 하미나 작가의 첫 책인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에서 다루는 젊은 여성의 우울증이 그렇다.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사회적인, 가장 작고 가장 거대한 이 문제를 어떻게 엮어낸다는 말인가? 최근 이 주제를 다루는 많은 책이 나왔지만 <미괴오똑>은 독보적으로 다층적이다. 2030 여성의 우울증이 어떻게 만들어졌나 분석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모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실상 젊은 여성들의 우울증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고 선언하는(56쪽), 연구서이자 고백적 에세이, 상담록이자 증언, 결국 선언에 이르는 책.
예를 들면 이렇다. 왜 유독 여성들이 우울증에 더 많이 걸리는가? 1부 "나의 고통에도 이름이 있나요"에서는 정신의학의 역사를 통해 우울증의 정의와 진단이 어떻게 구성되었나 알아보는 장이다. 작가는 의학사, 과학사, 과학사회학 분야를 왔다갔다하며 여성들의 고통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무시당해왔나 살펴본다(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의 <보이지 않는 여자들>과 같은 책이 떠오른다).
그런데 온전한 학문의 테두리 내에서 이 글이 쓰여졌다면, 역사적 분석에서 더 나아가기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이 분석에 생생함을 더해주는 것은 작가 개인의 경험이다. 작가는 어떻게 병을 진단받고 자신의 경험이 거부당했는지 직접 들려준다. 한 문장 한 문장 쉬이 넘기기 어려운 병증의 기록을 고백하면서, <미괴오똑>은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객관적' 연구서의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 정신질환 에세이는 많이 나오지 않았던가? 그중에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를 먹고 싶어>같은 베스트셀러도 있었고 말이다. 이 일단의 에세이들이 대개 내밀한 경험을 드러내며 정신질환의 가시화에는 성공하지만, 개인의 경험에 천착하여 모든 병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미괴오똑>이 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개인이라는 테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2부 "죽거나 우울하지 않고 살 수 있겠니"에서 작가는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젊은 여성 31명을 인터뷰하여 젊은 여성들이 겪는 우울증의 공통 경험을 뽑아낸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가정환경, 상황을 악화시키는 연애관계, 힘없는 자를 착취하는 사회 구조 등. 개별 여성들의 경험이 인터뷰를 통해 사회적 현상으로 구체화하면서 이 책은 생애구술사적 의미도 가지게 된다(의료인류학을 하는 이현정 교수가 추천사를 쓴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작가는 병을 앓는 사람인 동시에 병을 앓는 사람을 관찰하는 입장에서 여성 우울증의 사회적 근원을 추적하고, 그래서 이 책은 강한 설득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써야하는,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 이 글을 쓴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저자와 증언자들의 용기다. 가장 사적인 방식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 이야기를 사회적 담론의 장으로 끌고 나가는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 아닐까. 믿지 않으려 하는 남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나를 드러내보이고 다른 이들의 증언을 모으는 용기. 오만하고 똑똑해서 자신의 삶을 살다보니 미쳐있고 괴상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여자들의 용기.
그래서 이 책에서 일부만 읽어야한다면, '자살'과 '돌봄', '회복'에 대해 얘기하는 3부 "이야기의 결말을 바꿀 수 있다면"과 에필로그를 권하고 싶다.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할지에 대해 목소리를 모으고 들려주신 모든 분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 책은 연구서도, 에세이도, 상담록도, 선언도 아니지만 그 모두이기도 하다. 학문이나 장르같은 경계로 책을 구분지었을 때 남는 빈틈을, 마지막 퍼즐을 맞춰주는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안도하며 읽었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은 앞으로 2021년의 책을 이야기할때 빠지지 않고 나올 텐데, 실은 그보다도 훨씬 오래 보게 될 것이다. 여러 번 레퍼런스로 다루어질 책. 써야하는,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 이 글을 썼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꾸준히 내 사회적 위치(30대 남성)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이 책을 여러번 읽는다 한들 당사자인 한국의 2030 여성분들이 읽는 것보다 깊은 독해의 경험이 나올 수 없으리라. 관심이 생긴다면 책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