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에겐 더 좋은 길이 필요하다

by 서선영
우리에겐 더 좋은 길이 필요하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동안 프로젝트를 통해서, 콘텐츠를 통해서 메세지를 전달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책' 이라는 형태로 전달해보고자 브런치북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연재를 시작하는 시점, 프롤로그에서 내가 왜 더 좋은 길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특별히 되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적극적으로 진로를 고민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고3이 되면서 어느 대학에 갈지 어떤 과에 갈지 슬슬 정해야 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평생 질리지 않고 할 수 있는 행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산책이 떠올랐다. 세자매 둘째인 나는 어릴 때 한 방에서 언니, 동생과 같이 지냈다. 집에는 나만의 공간이 없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면 집을 나와 동네를 걸었다. 걸으면서 주택, 상가, 거리, 사람들 등등을 구경하는 일은 나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산책은 아마 평생할 것 같았다. 산책과 관련된 전공을 찾아보다가 도시공학과를 알게 되었다. 도시, 지역, 공원 등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전공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내가 항상 동네를 산책하는데, 그 동네를 내가 만든다면 꾸준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도시공학을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고, 학부 공부가 재미있었던 나는 대학원까지 진학하였다.


졸업 후 건축설계사무소 도시본부에 입사하게 되었다. 나의 업무는 캐드 도면에 인동간격을 맞춰 아파트 주동을 최대한 많이 배치하는 것이었다. 그 땅의 지형이나 주변 주거지의 맥락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ㄱ’ 자 아파트 평면 딱지를 얼마나 많이 넣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내가 대학에서 배운 것과는 달랐지만, 업계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그러나 약 2년쯤 다녔을 때 갑작스럽게 해고 통보를 받았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의 여파가 한국을 덮치면서 건설경기가 하락했고 그 여파로 내가 다니던 회사는 사원대리급 몇십명을 권고사직 처리했다.


나에게 이 해고 사건은 내가 하는 일의 '지속성'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도 세상은 끊임없이 변할 것이고, 그때마다 회사나 조직은 영향을 받고 휘청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회사나 조직에 의지 않지 않는 나만의 일을 찾고 싶어졌다. 어딘가에 소속된 '직장인'이 아닌, 나만의 노하우를 가진 '직업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오래 할 수 있는 그런 일. 나에게 맞는 '업'을 찾기 위해서 일단 나는 다양한 일을 경험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겨우 사회생활 2년차,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소소도시를 창업하기 전까지 약 10년 동안 도시설계와 관련된 회사나 조직 6군데를 거쳤다. 도시 정책 연구, 도시계획, 공동체비즈니스 지원, 마을만들기 지원 등 다양하게 경험했지만 계속 무언가 부족했고 마지막으로 간 곳이 부동산개발 회사 였다. 나는 이곳에서 상업업무빌딩 마스터리스 PM을 담당했다. 그러던 와중, ‘타운매니지먼트’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우리 회사가 포함된 주변 지역의 공공공간을 민관 협력으로 활성화하고 관리하는 거버넌스 프로젝트였다. 개별 부동산에 대해 고민하다가, 도시 차원의 공공공간을 마주한 순간 나는 오랜만에 설레기 시작했다. 공공공간의 구체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현장에서 이해관계자들과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그 즈음 개인적으로 또 다른 타운매니지먼트 프로젝트 제안이 들어왔다.


어쩌면 이렇게 공공공간을 현장과 밀착해서 다루는 일이 내가 찾던 '업'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생각해보니 항상 나는 내가 다니는 길, 동네의 공공공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길을 걸으면서도 노면 포장, 가로 시설물, 주변 건축물, 프로그램 등등을 살피며 더 좋은 길이 되는 상상을 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매일 걷는 출퇴근길이 좀 더 좋아져서 자동차를 조심하는 긴장감이 줄어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더 좋은 길을 만드는 일은 내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자,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고, 결국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 제안을 받은지 3개월 뒤, 시청역 앞 사무실을 얻어 ‘소소도시’라는 이름의 회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더 좋은 공공공간, 더 좋은 길을 만드는 일들을 찾아 했고, 자체적으로 프로젝트를 만들어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팝업 파클렛’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추진하며, 보행중심 도로공간의 필요성을 알려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길’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점 커졌다. 왜 우리의 이면도로 보행환경은 20년전 내가 대학생일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세계의 도시들이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도로 환경을 보행중심으로 전환해 나가는 동안 우리는 왜 아직 제자리일까. 그리고 왜 우리는 길에 대해 관심이 적을까, 왜 더 좋은 길을 원하고 요구하지 않을까.


변화를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내가 본 가능성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었다. 팝업 파클렛으로 길 위의 일시적인 변화를 선보였다면, 이제는 글을 통해 더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니터 앞에 앉아 원고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연재할 글은 단순히 해외도시 이야기를 소개하는 사례집이 아니다. 시민의 한 사람이자 산책자로서 우리 도시의 길에 대한 질문이자, 우리가 함께 누려야 할 풍경에 대한 청유에 가깝다.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동네 구석구석을 탐방하며 길 위에서 위로를 얻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일상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거나 아이들이 뛰어노는 풍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에너지를 얻곤 한다. 훗날 내가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해졌을 때, 집 앞에 이웃들의 생동감을 구경할 수 있는 거리의 쉼터나 작은 광장이 있다면 나의 노년은 조금 더 인간답고 풍요로울 것이다. 이는 비단 나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람에게는 사람들을 보고 교류할 수 있는 접점이 필요하다. 질 좋은 공공공간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하며, 누군가의 외로움을 치유할 수 있다. 또한 차 조심을 하며 걷던 출퇴근길이 조금이라도 안전해진다면, 사람들은 조금 더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걷기 좋은 길, 머무르기 좋은 길이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가장 먼저 집 앞 ‘길’에 관심을 갖기를 소망한다. 나아가 그 변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동참하기를 바란다.


이런 바람으로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책’을, 그것도 ‘길’에 대해 쓰게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아주 조금이라도 길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되기를, 그리하여 일상 속에서 지금보다 더 좋은 길을 원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