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 1] "그래도 자동차 먼저..."

사람중심도로는 가능한가

by 서선영

언젠가부터 길을 걷다 보면 바닥에 색이 칠해진 길이 꽤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록달록 패턴을 넣은 길들이다. 바닥에는 '차보다 사람이 우선' 이라는 문구도 보인다. 그러한 문구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동차는 사람을 추월해 쌩 달려나간다. 문구를 보고 조금 편하게 걸을 수 있으려나 잠깐이라도 기대했던 마음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길을 좀 더 걷다보면 '보행자우선도로' 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아무도 지키지 않고, 아무도 체감하지 못하는 거리에서 그 이름은 공허하기만 하다.


사실 보행자우선도로는 2022년 보행안전법과 도로교통법 개정을 통해 도입된 제도다. 보도와 차도가 섞인 좁은 길에서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차량보다 사람이 우선하도록 법으로 지정한 것이다. 이제 운전자는 보행자와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서행하거나 일시정지해야 하고, 이를 어기면 5만원의 범칙금이나 벌점이 부과되기도 한다. 하지만 법의 의도와 달리,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도는 낮다. 여전히 내 옆을 위협적으로 지나가는 차들을 마주할 때면 보행자의 법적 권리는 멀게만 느껴진다.


2024년 기준 전국에 지정된 보행자우선도로는 269개에 달한다. 2022년 7월 도입된 이후 2년만에 꽤 빠르게 확산된 셈이다. 과연 이런 도로 지정을 통해 어떤 효용이 있었을까. 일단 보행자, 운전자의 행태는 도로 지정 이후에도 달라진 게 크게 없다. 도로변 불법주차도 예전과 같고, 자동차는 여전히 보행자 옆을 빠르게 지나간다. 주차된 자동차와 주행하는 자동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야 하는 불편함은 계속 된다. 그럼에도 정기적인 도로 포장 보수는 계속된다. 보행자우선도로라는 선언적 지정이 실제 보행 환경의 개선보다는, 예산을 집행했다는 '행정적 기록'이나 '시각적 변화'에 치중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image.png 「말뿐인 '보행자 우선도로'... 여전히 "사람보다 차가 먼저"」, MS투데이 박기영 기자, 2024.03.05.


한편, 요즘 울타리가 쳐진 길도 많이 보인다. 좁은 골목에 겨우 사람 한명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폭으로 편측 보도가 만들어져 있고, 보도와 차도 사이에 울타리가 세워져 있는 길. 바로 어린이보호구역이다. 나는 이 울타리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중간에 빠져나갈 길이 있는지 한참을 살피다 결국 차도로 걷기 시작한다. 가다가 옆 골목으로 빠져야 하는데, 저 울타리 쳐진 '터널'로 들어가면 중간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보도가 없는 길보다는 낫겠지만, 정작 보행자가 선택하기 꺼려하는 '보도'이다.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좁은 보도를 만들고 울타리를 치는 방법이 어린이를 위한 최선일까. 아무리 아이들의 체구가 작다 하더라도 성인 한명 지나갈만큼의 폭은 아이들에게도 불편하다.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 나누고 지나가다가 장난도 치며 하교하는 아이들의 일상을 담아낼 수 없는 삭막하고 불편한 공간이다.


무엇보다 이 울타리는 보행자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가로의 활력을 차단한다. 길가 상점과 보행로 사이를 가로 막은 울타리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진입을 방해하고, 한번 진입하면 중간에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요즘에는 중간 중간 울타리를 열어놓은 곳을 만들어 놓긴 했지만, 건너편 가게에 바로 진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맞은편에서 사람이 걸어오기라도 하면 난감하다. 비좁은 통로에서 몸을 구겨 지나가야 한다. 이러한 물리적 단절은 결과적으로 길 위의 다양한 삶을 지우고, 우리의 일상을 단순화시킨다. '걷는 건 불편해'라는 인식을 강화시킨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어린이들의 일상적인 소소한 즐거움과 길위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삶의 다양성을 포기해도 되는 것일까? 안전과 일상이 공존할 수는 없을까?


자동차라고 편하게 주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도가 분리되어 있지만 차도로 걷는 사람들이 많다. 불법주차도 여전하다. 도로 상황은 비슷한데 오히려 차도 폭이 줄어들어 운전 난이도는 더 높아졌다. 결국 보행자나 운전자 누구에게도 안전하고 편안하지 않은 길이 되어버렸다.


어린이의 안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이들을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두는 안전' 뿐일까. 안전을 확보하면서도 다양한 삶이 가능한 '공존하는 안전'은 불가능한 것일까.


image.png 「아이들도 아는 스쿨존 ‘주정차 금지’ 어른들은 왜 모르나 」, 기호일보 유지웅 기자/ 2024.04.21.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보행 안전이나 어린이 안전을 위해 만들어 놓은 길들이 많긴 한데, 안전함을 느끼기 보다는 불편함, 어색함, 인위적임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보행 안전 관련 사업들의 효과가 잘 체감되지 않다보니, 이제는 길을 바꾼다고 무슨 변화가 있겠나, 우리나라는 자동차 중심 문화가 강해서 뭘 해도 안된다, 현상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에 그칠 수 밖에 없다는 등등 자조섞인 말들도 심심찮게 들린다.


사실 나도 도시계획 분야에서 약 15년, 보행환경 관련해서는 5년 정도 프로젝트를 추진해오면서 우리의 도시는 약한 존재를 보호하며 더불어 사는 문화보다 강한자만 살아남는 적자생존, 각자도생 문화가 우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누구나 사람, 안전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구체적으로 사람을 위한 공공공간, 사람을 위한 길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에는 자동차라는 단일 이동수단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가치관이 굳게 버티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행정에서는 자동차 통행을 막거나 불법주차를 단속하면 민원이 많아진다고 한다. 상인들은 안전도 좋지만, 자동차로 가게 앞까지 오지 못하게 하거나, 가게 앞 불법주차를 단속하면 상권이 망한다고 한다. 초등학교 앞 차없는 거리를 만들자고 했을 때 어느 부모님은 안전도 좋지만, 자동차가 교문 앞까지 가야 안전하게 아이를 내려줄 수 있다며 차가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설득해 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보행안전, 어린이안전 다 좋지만 그래도 자동차가 접근해야지, 그래도 자동차가 통과할 수 있어야지... '자동차'는 변하지 않는 최우선가치로 자리잡고 있다. 결국 사람과 안전을 위해 최우선으로 두겠다는 '의지'만 표지판으로 남긴 채, 기존의 자동차 중심 체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업이 마무리되곤 한다. 그리고 문제와 불편함은 해결되지 않고 계속된다.


그렇다고 자동차의 통행권 확보를 이야기하는 이들을 탓할 수 만은 없다. 자동차 운전자들 역시 보도와 차도가 뒤섞인 좁은 길에서 보행자가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 속에서 주행해야 하는 시스템의 피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의 길은 보행자에게는 불안을, 운전자에게는 피로를 주는 모두에게 불친절한 구조와 시스템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도시의 도로공간체계 문제가 보행자, 운전자 등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우리나라 특유의 경직된 '가로망(Street Network)' 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 우리의 길은 극단적인 두 가지 모습으로 나뉘어 시민들의 삶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나는 수십 년 전의 낡은 기준에 머물러 있는 '골목길'이다. 좁은 길에 고밀 개발이 더해지면서 사람과 차, 주차 공간이 뒤엉켜 모두의 안전을 위협한다. 다른 하나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에 가로막혀 보행의 흐름이 끊겨버린 '단절된 대로'이다. 이곳에서 길은 그저 단지를 둘러싼 거대한 벽이 되어, 걷는 즐거움과 연결을 가로막는다. 전자가 인프라 부족으로 인한 불편함을 준다면, 후자는 단절로 인한 삭막함을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이러한 물리적 환경이 우리 사회 전반에 '길의 주인은 자동차'라는 고정관념을 만들고 강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HW의 물리적 한계는 SW 적인 관리 부재와 맞물리며 더욱 고착화되었다. 꾸준히 늘어나는 도시 내 차량대수, 통행량 등을 조절하지 않는 상태에서, 주차공간 의무화 등 대책이 마련되지 못했다. 공공공간인 길을 사적인 주차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에 관대했던 인식은 좁은 골목길을 사실상 거대한 노상 주차장으로 변질시켰다. 결국 제대로된 관리와 단속이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길은 공공의 안전보다 개인 자동차의 통행과 사적 재산인 자동차를 보관하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걷기 좋은 도시, 삶의 장소로서의 공공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행환경개선, 보행중심의 교통체계 구축 등의 즉각적인 솔루션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도시공간구조를 개선하는 HW 전략과 주차 및 통행량을 조율하는 SW 차원의 관리 정책이 동시에 실행되어야 한다. 구도심은 보행중심의 환경과 교통체계로 개선하면서, 대규모 정비나 신규 개발 지구는 여전히 자동차 중심의 '단절된 대로'로 이루어진 도시로 정비/개발하는 엇박자는 우리를 궁극적인 목표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관련 기사

- 말뿐인 보행자우선도로... 여전히 "사람보다 차가 먼저" (ms투데이, 박지영 기자/ 2024.03.05.)

- 아이들도 아는 스쿨존 ‘주정차 금지’ 어른들은 왜 모르나 (기호일보, 유지웅 기자/ 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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