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 2] 삶을 위한 길, 미래를 여는 길

by 서선영

우리들은 거리에서의 안전과 삶을 중요하다 이야기 하면서도 ‘그래도 차가 우선‘이라는 신념이 깊게 박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신념의 역사는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30-40년 전까지만 해도 길은 놀이터였고 평상을 두고 이웃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삶의 공간이었다. 자동차를 보유한 가구가 많지 않았고, 밀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동네의 길에는 듬성 듬성 주차된 차들이 있을 뿐 자동차의 통행도 많지 않았다. 80년대생인 나는 어릴 때 길에서 뛰어 놀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나가면 차 조심해라'는 말을 부모님께 자주 듣기 시작했고, 실제로 길에 자동차가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에서 노는 아이들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내가 자라온 시간 동안 길은 서서히 자동차의 주차장이자 주행공간이 되어갔고, 그 풍경은 그대로 우리의 신념으로 자리잡았다. 이제는 아무도 길에서 놀지 않는다. 길을 걷는 것은 당연히 불편하고 위험한 일이며, 길은 자동차가 다니는 곳이니 걷는 사람이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공통 상식이 되었다. 공공의 장소였던 길이 자동차라는 사유물의 통로로 전유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길을 향유할 권리를 서서히 잃어버리게 된 셈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수많은 현대 도시들이 공유하는 생활양식이다. 해외의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보유하고, 자동차로 이동하며, 자동차 중심으로 생각한다. 이는 근대에서 후기근대, 현대사회로 넘어오는 당연한 수순이자 변화였다. 그 과정에서 자동차 중심의 도시공간이 끊임없이 재생산되었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 되었다.


걷기 좋은 도시로의 전환


이런 반복과 재생산의 싸이클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자동차 중심의 도시 개발로 인하여 도시가 더이상 삶의 장소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삶을 위한 도시, 즉 '휴먼스케일'의 공공공간과 걷기 좋은 도시에 대한 연구와 설계/계획,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보행 중심 도시를 구축하는 것은 삶의 질을 높이고, 도시의 지속가능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이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걷기 좋은 도시

2000년대 들어서면서 탄소 저감을 통한 기후변화 대응이 전 지구적 과제가 되면서, 자동차 중심의 도시를 보행 중심의 도시 구조로 전환하는 것은 이제 선택의 영역을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n분 도시'라는 정책기조로 나타나기도 하고, '슈퍼블록' 이라는 새로운 도시컨셉으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러한 도시들의 노력이 단순히 길, 광장, 공원 등 공공공간에 대한 물리적 환경 개선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기후에 대응하는 도시공간구조로 전환하려면,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의 양식'이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보행로를 만들어도 우리가 자동차 중심의 인식을 갖고 있다면 그 공간을 진정한 보행공간으로 기능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자동차가 아닌 보행을 당연한 선택지로 여기고 이를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진정한 보행 중심의 공간구조 전환이 가능하다. 그래서 도시들은 공간 환경의 개선과 함께 길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안전'이나 '교통'이라는 기능적 단어보다 '삶'이라는 본질적인 단어로 시민들과 소통한다. 우리 그리고 아이들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그 무대인 '길'이 어떻게 변하면 좋겠느냐고 시민들에게 묻고, 이러한 변화를 함께 만들어보자고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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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m 같은 폭의 보차혼용도로이지만 너무 다른 가로환경 (좌)벨기에 안트베르펜 가든스트리트(사진: Jeroen Broeckx) (우)서울 강남구 이면도로
벨기에 안트베르펜 '가든스트리트(Tuinstraten)'사업은 기후 변화에 적응하고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도심 지역 가로공간에 녹지를 조성하는 시범사업이다. 아스팔트 도로를 걷어내고 투수성 포장과 녹지대, 우수 활용 건천 수경공간 등을 조성한다. 녹지대를 조성하며 자연스럽게 시케인(S자형 도로)을 도입하여 자동차 속도를 줄인다. 녹지 공간 접근성이 부족한 지역의 노인, 어린이, 공공주택 거주자 등 기후 변화의 영향에 특히 취약한 계층을 대상으로 추진하고 있다.



고령사회에 필수적인 걷기 좋은 도시

이러한 변화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것이면서, 고령사회에 대응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애주기에는 자동차를 운전하지 못하는 시기가 분명히 존재한다. 아동청소년기와 노년기이다. 주로 '보행'하며 신체적으로도 약한 존재인 이들은 도로 위에서 교통약자로 불린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는 앞으로 도시 내 고령자 비율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노화가 진행되면 운전대를 놓게 되고,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반경으로 생활권이 좁아진다. 이때 동네의 보행환경은 고령자의 건강과 삶의 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집 앞 길에서 안전하고 쾌적하게 산책하고, 걷다가 잠시 앉아 햇빛과 자연을 즐기며 이웃과 대화할 수 있다면 신체적, 정서적 건강을 모두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집을 나서는 순간 자동차의 위협을 느껴야 한다면, 고령자들은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노화가 더욱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과연 무엇이 더 행복한 노년의 모습일까?


자율주행이 만드는 미래 도시 "걷기 좋은 도시"

한편, 삶을 위한 길은 자율주행이 보편화될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이미 자율주행 택시가 상용화되었고, 우리나라에도 기술 적용 단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도로 위에서 이동하는 것은 모두 자율주행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런 시대에 과연 도로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까? 우선 자율주행 모빌리티는 교통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여 최적의 동선으로 이동하며 교통법규를 완벽히 준수할 것이다. 인간과의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주행하게 되면, 도로변 불법주차는 사라지고 차량 이동의 효율은 극대화될 것이다. 특히 차가 스스로 움직이는 시대에는 길가를 채웠던 주차 차량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결국 도로에서 자동차가 차지하는 물리적 면적은 줄어들 것이고, 그 여유 공간은 보행과 활동, 자연 즉 사람들의 삶으로 채워질 것이다. 사람들이 길에서 안전하게 걷고, 앉아서 쉬기도 하며,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는 일상. 이것이 내가 상상하는 미래 길의 모습이다. 자율주행 기술이 가져올 도로 공간의 효율성은 사람에게 '길의 주도권'을 되찾아줄 기회가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기회를 활용하여, 새로운 삶을 담아낼 수 있는 도로 공간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길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고령자의 행복한 삶의 장소가 되며, 자율주행 시대의 삶을 담아내는 길, 그런 도시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그런 미래를 그리고 준비해나가고 있는 해외 도시의 사례를 통해 그 해법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해외사례를 답습하거나 부러워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만의 해법을 찾기 위해, 앞서 고민한 이들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보다 먼저 삶을 위해 길을 바꿔본 도시들이 어떻게 실행했는지, 그 방법을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일상 속 작은 공간부터 시도한 사례를 소개한다. 거창한 마스터플랜이나 대규모 공사가 아닌, 우리 집 앞 주차장 한칸이나 도로의 모퉁이 공간, 학교앞 골목 등 작은 공간의 쓰임새를 바꾸는 것부터 시작한 도시들을 살펴본다. 다음은 동네의 체질 개선을 위해 도시공간구조를 조정한 사례 이다. 단순한 환경개선을 넘어서, 끊어져 있는 보행자길을 연결하고, 단순 통과교통을 줄이는 등 동네의 통행 구조를 조정하여 사람 중심의 동네를 만든 도시들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공공공간을 '장소'로서 운영관리하는 매니지먼트 사례 이다. 잘 만들어진 길이 지속가능한 공공공간으로 기능하려면 지속가능한 관리체계가 필요하다. 민간과 행정이 협력하여 길을 운영하고 가꾸어 나가는 도시들을 살펴본다.


각 사례들은 뉴어바니즘 이후 대안적 도시이론들이 정책/제도에 적용되어 실제 작동한 프로젝트 중심으로 선정하였다. '길'이라는 공공공간을 다루다 보니 플레이스메이킹, 택티컬어바니즘 기반의 프로젝트가 많다. 한국에 이미 자주 소개된 사례보다는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례를 선정했다. 그리고 가급적 최근 또는 현재진행 중인 사례를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해외 도시들의 사회문화와 도시적 맥락은 우리의 그것과 차이가 존재하므로, 그들의 방식이 우리에게 바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그들의 노력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도로공간은 지금 이대로 좋은지, 변화를 바라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그 작은 변화가 우리 도시를 훨씬 살기좋게 만드는 '시작'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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