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 때 제 몫을 해내는 아이

걱정하지 않기, 할 수 있음을 온전히 믿어주기

by Cactus

"엄마 전화 받았다! 엄마한테 아가 방금 뭐했는지 한번 말해봐!"

전화기 너머 할머니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이어 약간은 쑥쓰럽고 약간은 설레는 듯한 목소리로 아가가 말했다.

"엄마, 나 변기에 쉬했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가, 정말? 쪼르르 했어? 아고 잘했어, 정말 정말 잘했어! 엄마가 회사 끝나고 아가 번~쩍 안고 뽀뽀해줄게!"

아이는 "응, 엄마 이따가 빨리 와야돼!" 하며 툭 전화를 끊었다.


업무로 복귀하면서도 내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몇 개월동안 고민과 걱정만 해대던 나의 "아기 기저귀 떼기" 숙제를,

수 개월이 더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어려운 과제를 결국 내 아이가 간단히 해결해준 것이다.

제 때 제 몫을 해낸 것이다.




아이의 기저귀 떼기 훈련을 슬슬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내가 미국 시험을 마치고 귀국한 7월 즈음이었다.

당시 아기는 28개월.

보통 만 3세 전후에 기저귀를 뗀다고 하니, 아직 배변훈련이 급하진 않았다.

하지만 우리 아이는 기저귀의 존재를 인식했고, 배변을 하기 전 스스로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했다. '이제는 때가 됐다'는 판단이 선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제는 늘 그렇듯, "어떻게?" 였다.


어떻게 배변훈련을 시작해야 하지. 나는 초반부터 방법을 찾느라 애썼다.

우선 유아변기를 구매했다. 아기가 유아변기를 좋아할 수 있게 알록달록한 분위기를 형성해두기도 했다.

하지만 초반에 변기에 흥미를 보이던 아기는 이내 앉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를 받아하는 아기를 보며 나와 남편은 암초를 만난 듯 당황했다.


이번엔 친정엄마가 나섰다. 언니와 나, 조카를 포함해 네 번째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나름의 방식을 고수했는데, 이는 "일단 무작정 변기에 앉혀 몸이 변기에 친숙해지도록 유도한다"는 상당히 심플하고 고전적인 방법이었다. 할머니의 추진력으로 아기는 유아변기에 앉아 뽀로로를 보고 책을 보며 오래 앉아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변기와 친해지기만 했을 뿐, 역시 쉬는 없었다.


결국 나의 걱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다 빵, 터져버렸다. 아기를 재운 후 나는 퇴근 후 너덜너덜해져있는 남편을 붙잡고 긴 시간 하소연을 해댔다. "이렇게 아기가 싫어하고 거부하는데 스트레스 주면서까지 기저귀를 떼게 하는 게 맞아?" "지금 이 아기에게 너무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을 요구하는 건 아냐?" "내 욕심인가? 그냥 알아서 뗄 때까지 3살이고 4살이고 기다려? 그게 맞아?"

뭐 물론, 우리는 또 답을 찾지 못했다. 육아에 객관식 정답은 없으니까.


그런데 웬걸. 아기가 또 한 번 나의 고민과 걱정을 시원하게 부러뜨려줬다.

제 때 제 몫을 온전히 해내면서.

아이는 해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걱정하는 대신 아이를 믿어줘야 했다.





생각해보면 아이는 늘 제 때에 제 몫을 부단히 해내왔다.


기존에 다니던 어린이집이 원생 부족으로 폐원을 했을 때, 나는 낯가림이 심한 우리 아이가 새로운 어린이집에 가서 적응을 못할까봐 걱정이 앞섰었다. 그 때 같은 반의 한 엄마가 "그건 아이의 몫이에요. 우리는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서 스스로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믿어주면 돼요." 라고 말했고, 나는 '흥, 낯가림이 없는 괄괄한 아들을 키우고 있으니 말이 쉽게 나오는 건가,'라며 속으로 심술을 부렸다.


그런데 나의 딸은, 그 엄마의 말이 맞았음을 찬찬히 증명했다.


어릴 때 내가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정신없을 때도

아기는 내 앞에서 제 때 뒤집고, 제 때 "엄마"를 부르고, 제 때 물건을 잡고 두 발로 일어섰으며,

달리 연습을 시킨 게 아닌데도 빠르게 입이 열려 수다쟁이가 됐고,

내가 그렇게 걱정했던 새 어린이집 적응도, 결국 아주 잘 해냈다.


그러더니 이젠 스스로 배변훈련도 해낸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아이가 제 몫을 잘 해낼 수 있는 아이임을 믿어주지 않고 겁만 먹었던 나에게 있었다.

아이는 이미 그럴 해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역할은, 아이가 행여나 다칠까 노심초사 보호만 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제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고 응원해주는 것이어야 했다.




"엄마야! 이리 와 봐요, 아기가 또 쪼르르했어요! 잘했다 칭찬해주세요!"

오늘 아침, 출근 준비 중 남편이 격앙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빗질을 멈추고 바로 거실로 달려가자 아기가 유아변기에 앉은 채로 커다란 눈을 꿈뻑이며 말한다.

"엄마! 나 변기에 쪼르르 또 했어요!"

칭찬받을 준비를 마친 기대감 가득한 눈망울이 사랑스러워 나는 아기를 꼭 안아주고야 만다.


아기는 늘 그렇듯 제 때 제 몫을 해낸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도움이나 걱정이 아니라, 아이가 해낼 수 있음을 알고 믿어주는 엄마의 마음일지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육아, 나만의 서술형 답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