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 걸, 헬로우! 나이스 투 미츄!
또 한 명의 남자가 반갑게 인사하며 내게 다가온다. 이번엔 키가 작고, 덩치는 크고, 턱수염과 콧수염을 잔뜩 기른, 인상부터 매우 능글맞아보이는 사람이다.
하이, 나이스 투 미츄. 아이엠 비지. 쏘…(갈길 가세요)
알 유 비지? 아이캔 헬프 유. 아이캔 캐리 유어 배기지 투 유어 호텔. 웨얼 이즈 유어 호텔?
노 땡큐. 아이캔 핸들 잇. (갈길 가라고)
알 유 코리안? 두 유 해브어 보이프렌드?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는데, 갑자기 두 눈에 힘이 빡 들어간다. 가뜩이나 남자친구 없어서 외로워 죽겠는데 감히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었겠다? 그것도 맥락없이?
예스. 아임 코리안 앤 아이 해브어 보이프렌드. 위 알 쏘~쏘 러블리 커플. 고어웨이. 땡큐. (썩 꺼지란 말 안들리냐)
오. 유 해브어 보이프렌드, 굿포유! 댄 하우어바웃 터키쉬 보이프렌드? 위 캔 비 어 커플 인 터키.
능글맨은 싱글싱글 웃으며 두 팔을 벌려 나를 막아선다. 터키에 도착한 지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그것도 사람들이 가득한 큰 공원 한가운데서, 벌건 대낮에.
터키 사람들은 한국 여자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행잡지에서도, 일반 블로그 포스팅에서도 봤다. 하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스스로가 여행만 떠나면 주위를 과도하게 경계하는 안전주의자인데다, 수많은 남자들이 들러붙을 정도로 외모가 빼어난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웬걸. 이 공원에서만 세번째로 길거리 헌팅(?)이 들어온다. 게다가 세번째 남자는 친히 터키 현지 남친이 되어주겠단다.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161cm의 자그마한 동양 여자애가 커다란 배낭을 매고 구부정하게 걷는 모습이 안쓰러워보이나? 아님 그저 신기하고 재밌나? 그것도 아님 내가 혼자 돌아다녀서 만만해보이나?
관심을 주면 더 좇아오겠지. 나는 고개를 홱 돌리고 아야소피아 박물관 앞을 지키는 경찰에게 다가갔다.
하이. 익스큐즈미. 두유노 웨어 마이 호텔 이즈? 디스 이즈 어 맵. 앤 어드레스.
경찰이 지도를 유심히 보는 순간, 나는 아주 당당한 표정으로 능글맨을 쏘아봤다. 여기 경찰아저씨 있다. 다치기 싫으면 얼른 니 갈 길 가라.
그런데 이 남자, 도망치거나 뒷걸음치키는 커녕 입모양으로 키스를 보내며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마치 ‘스윗한 터키 보이프렌드 여기 있어. 다시 한 번 생각해봐!’ 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호텔이 위치한 방향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니 능글맨은 사라지고 없었다. 거리엔 수많은 관광객 무리들, 공원 장터를 찾아온 시민들, 번쩍이는 모스크 첨탑, 그리고 나랑 눈이 마주치자 느끼한 웃음을 보내며 좇아올 태세를 갖추는 또다른 능글맨들 뿐이었다.
터키에 있는 열흘동안 나는 많은 능글맨들을 만났다. 예레바탄 지하궁전에서 갑자기 나타난 능글맨은 진지하게 사귀어보고 싶다며 무려 30분 가량 나를 따라왔다.(나는 전화하는 척, 화장실가는 척 하다 그래도 좇아오자 결국 경찰의 힘을 또 빌렸다). 감자빵을 파는 매대 주인은 나이 많아보이는 알바생에게 엄청 혼을 내던 중(빵 제대로 만들어, 토핑이 빠졌잖아!), 내 얼굴을 보곤 표정이 사르르 풀리더니, 사진을 찍어 나를 간직하고 싶다고 했다. (대체 나를 왜? 뭐, 얼떨결에 다같이 한 장 찍긴 했다)
그런 능글맨들에게도 나름의 원칙이 있으니.. 내가 ‘싫다, 저리 꺼져라’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면 더이상의 위협 없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예레바칸의 스토커, 그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능글맨들이 어떤 특정한 사건사고가 아니라 ‘터키에서의 추억’으로 기억된 것은 그 때문이다.
아니지, 사실 밤 9시엔 숙소에 들어와버리는 나의 귀소본능도 한 몫 했다. 자고로 여행지에선 덜 즐길지언정 밤에 혼자 돌아다니면 안 된다. 조심해서 나쁠 것 하나 없다.
터키 여행 막바지에 들어서자 나는 악의없는(!) 선의의 능글맨들을 요령껏 활용하기 시작했다.
(응 안녕, 미안한데 시간은 없어. 근데) 내가 길을 모르거든, 지하철역이 대체 어딨는거야?
(어 그래, 코리안 맞아. 근데) 내가 혼자 와서 사진 찍어줄 사람이 없어. 사진 좀 찍어줄래?
(응 남자친구는 있어. 근데) 이 버스 탁심광장으로 가는 것 맞아?
내가 물어보면 그들은 열의에 불타 질문에 답해줬고, 나는 고마워! 라는 눈웃음을 보내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 한번 꼬셔보려다 역으로 질문을 받은 능글맨들이 당황해하며 제공하는 현지 정보는 대체적으로 정확했다. 그리고 아주 유용했다.
어이쿠, 터키 며칠 돌아다녔다고 벌써 그들을 대응하는 노하우가 생겨버렸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여전히 궁금한 것. 감자빵집 능글맨은 대체 왜 나에게 사진을 찍자고 했을까? 내 카메라로 찍어서 정작 본인은 사진을 갖지도 못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