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란잔 Oct 28. 2018

달 착륙보다는

퍼스트맨(First Man, 2018년 作)



달 착륙보다는 - 퍼스트맨(First Man, 2018년 作)


닐 암스트롱(라이너 고슬링)이 달에 첫발을 내딛은지(1969) 어느덧 50년쯤 흘렀다. 2018년 현시점의 인류는 이제 달을 넘어 화성까지 정복했다. 이런 자문을 해보았다. NASA(미국항공우주국)가 일궈낸 어떤 역사적 쾌거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을 느끼지 못하는 나 같은 소시민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나는 '느끼지 못하는'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업적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의 삶이 그것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깨달을 정도로 고도화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나와 상황이 유사하지 않을까.


달 착륙을 추억하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 그 순간을 기억하는 이들은 아무리 적게 잡는다 해도 이미 머리가 희끗해진 60대 이상의 노인들일 것이다. <위플래시>, <라라랜드> 후 다음 영화도 분명히 음악을 경유하리라 의심치 않았던 할리우드 신예 루키 셔젤은 왜 50년 만에 아무도 흥미로워하지 않을 것 같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소환해 뜨거워지려 하는 것일까. 놀런과 스콧이 우주를 재창조하고 있을 때 당최 왜 그는 실화를 자신의 세계 속에 끌어들인 것인가.

질문이 틀렸다. 뜨거워지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퍼스트맨>은 전체적으로는 시네마스코프(2.39  : 1)를 사용했고, 종반부 달에서의 시퀀스에서는 digital IMAX(1.90 : 1), IMAX Laser(1.43 : 1)을 사용했다.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물리적 크기의 극대가 가능함에도 본편은 마치 홈 비디오를 찍듯 닐과 그의 주변을 파고드는데 주력한다(물론 이 도박에 가까운 선택은 앞선 두 작품의 메가 히트 전력과 스필버그라는 감독 친화적 제작자가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본편은 뜨거워지려면 충분히 그것을 가능케하는 고퀄리티의 장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왈츠가 흐르던 도킹, 랑데부 장면 정도를 제외하면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탁 트인 광활함보다는 꽉 막힌 갑갑함을 담아내는 데에 주력한다.

뿐만 아니라 달에 착륙하게 된 의의에 대해 찬미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담백한 태도로 일관하는데, 달에 가기 위한 닐의 야망이나 원대한 포부 같은 것들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고, 달 정복을 향한 무분별한 국세 투자에 대한 조롱의 역사를 직시한다. 무려 세 번이나 강조해서 말하는 TV 속 케네디 대통령의 '결정했으니까 갔다'라는 발언은 속 빈 강정과 다름없는 패러독스 그 자체이고, 달에 착륙하는 순간의 NASA 관제탑의 희열과 착륙한 이들의 뜨거운 눈물 등의 클리셰들은 소거되었다.

그렇다면 본편은 달이 아닌 어디에 착륙하고 싶었던 것인가. 출발하기 전날 밤. 지지부진하게 아이들과 마주하기를 꾸물거리던 닐은 아내 자넷(클레어 포이)의 성화에 못 이겨 부엌에 앉는다. 두 아들에게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닐. 그는 지금 사각 틀에 둘러싸여 프레임 정중앙에 놓여있고 광활한 나머지 여백들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채워져 네 면에서 그를 옥죄고 있다. 이는 흡사 장대한 우주 속에 놓인 우주선이라는 점 하나, 좁디좁은 그 우주선에 갇혀 악전고투하는 우주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닐은 삶이라는 우주선 속에 갇혀있는 인간이다. 그가 우주선 밖으로 나가 달에 발을 뻗는 행위는 삶이라는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자 구원의 몸부림이다. 본편에서 그를 숨 막히게 하는 족쇄는 딸 캐런(루시 스타포드)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였다. 달에 도착한 그는 마침내 딸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를 떠나보내며 가슴속에 응어리진 상처를 조심스럽게 꺼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묻는다. 어쩌면 그의 모든 선택은 생존하기 위한 본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퍼스트맨>은 닐의 내면과 도킹하는 영화이다.

셔젤은 늘 보는 이들이 양립하기 원하지 않는 두 가치를 양립시키면서 삶의 아이러니를 진단했다. 폭력과 예술적 경지의 도달이 거친 사랑을 나누게 만들었고(<위플래시>), 성공은 이별을 담보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게 했다(<라라랜드>). 그렇다면 본편은 업적과 죽음의 접붙임 정도가 될까.

방사능 치료까지 받던 딸 캐런은 결국 죽고 만다. 그동안 아픈 딸의 치료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일을 할 수 없었던 닐은 아이러니하게도 딸의 죽음으로 인해 달에 가게 될 첫발을 내디딜 기회를 얻게 된다. 달에 도착하기까지 본편에 나온 것만 해도 4명의 동료가 사망한다. 그로 인해 결국 달에 함께 도착하게 된 동료는 가족들 간에 자주 친교를 가질 정도로 친해진 이들이 아닌 그와 몇 번 날을 세우던 버즈(코리 스톨)다. 인류가 달에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된 이유 중 하나를 사(死)라고 거론한다면 비약일까.

김혜리 기자는 왜 사랑과 성공을 모두 쟁취할 수 없느냐며 <라라랜드>의 사고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셔젤의 사상에 동의한다.

<퍼스트맨>의 미학은 닐의 내면에 착륙해 삶의 아이러니를 견인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무사히 달에 안착해 탐사선의 문이 열리던 순간. 카메라는 그 현장에 있기라도 한 듯 밖으로 빨려나가 우둘투둘 모난 달의 표면에 닐과 함께 도착한다. IMAX의 기술이 빛을 발하는 '달 시퀀스'가 2018년 관객들에 압도감을 선사하는 동안에 1969년 당시 전 세계 각국에서 TV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실제 역사의 풍경이 교차편집된다.

이 시퀀스는 위대하다. 조그마한 흑백 화면으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순간을 50년이 지난 지금 영화는 그것을 체험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셔젤은 본편에서 집 안의 심각함과 집 밖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동시성으로 <대부> 시리즈 어쩌면 <시민 케인>을 소환했고, 우아한 왈츠가 나오던 도킹, 랑데부 장면으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소환했다. 그에게 그리고 나에게 영화 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달 착륙을 가능케한 발전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기술의 발전이 단 두 명이 달에 첫 발을 내딛게 했다면 영화는 수천만명이 달 체험을 가능하게 했으니까.




★★★★☆ (별 4개 반)
기술의 발전은 단 두 명이 달에 첫 발을 내딛게 했다면 영화는 수천만명이 달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작가의 이전글 미국을 사랑한 아버지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