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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an 26. 2020

[단편소설] 삽입 된 슬리퍼 1

슬리퍼 삽입 사건


주문한 소포가 도착했다. 지압 슬리퍼. 발바닥이 닿는 부위에 개울가에서 볼법한 조각돌이 옹기종기 박혀 있는 아재스러운 슬리퍼. 자체 두께에 돌 높이까지 합치면 키 높이 깔창이 필요 없는 그 슬리퍼. 얼마 전 유튜브 예능 압축 영상에서 보았다. 어느 여자 아이돌 멤버가 이 슬리퍼를 신고 줄넘기를 하는 모습을. 많은 남정네들은 20대 초반 여성의 짧은 치마와 훤히 드러난 허벅다리에 주목했겠지만, 나는 오로지 그녀의 발목 아래에 집중했다. '저거 사야겠다'


찾아보니 종류는 다양했다. 돌의 형태가 다채로웠고, 발등을 잡아주는 밴드 부분의 디자인도 각양각색이었다. '슬리퍼로 변주를 주기엔 저 정도가 전부일 테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불만을 속으로 품으며 2만 원 남짓한 슬리퍼를 주문했다. 구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건.강.하.고.싶.으.니.까


혼자 사는 노총각이 글로 먹고살면서 피폐해 보이기까지 하면 그건 너무 전형적이다. 쌍팔년도 영화나 드라마에나 적절한 콘셉트다. '작가니까'보다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가 더욱 멋있다. 근육질 어깨 깡패는 아니어도 외향에서 선입견을 주면 안 된다. 건실한 직장인 정도로 보이면 딱이다.


나의 루틴. 기상과 동시에 프로바이오틱스를 한 알 삼킨다. 물론 공복 상태여야 한다. 식사 직후 비타민 C와 오메가를 삼킨다. 당연히 오메가는 EPA와 DHA의 합이 1000mg 이상이어야 한다. 30대가 되니 위가 약해진 것 같다. 식사와 식사 사이 양배추즙은 필수다. 이외에도 루테인, 마그네슘, 밀크씨슬 등등 먹어야 할 약이 많다. 최근 간헐적 단식까지 뻗어나가고 있는 나의 건강레이더에 저 슬리퍼가 포착됐다. 손발이 차서 한여름에도 실내화가 필수다. 보온에 혈액순환까지 챙기면 일석이조 아닌가.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소포 상단 내 이름과 주소가 쓰여있는 스티커를 뜯어 손으로 세절했다. 요즘 같은 세상엔 이런 정보 파쇄가 중요하다. 박스 연결부를 감고 있는 투명한 박스테이프는 늘 그렇듯 손으로는 잘 뜯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위와 칼은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은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는 이성보다 상자를 당장 뜯어야겠다는 감성이 더 크다. 기어코 갈기갈기 찢어 상자를 개봉했다. 슬리퍼를 감싼 비닐봉지까지 쥐어뜯자, 그것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침대에 걸터앉아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턱이 생각보다 높아 무릎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뭐지 이 쐐한 느낌은?' 돌 하나하나가 내 발바닥 사이사이에 하나씩 박히는 것 같다. 단순한 압각이 아니다. 한 알 한 알 각각이 내 살과 교감하는 느낌이다. '내 발바닥이 이렇게 예민한 곳이었었나?' 이 감각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쾌락에 가깝다. 사정 직전의 희열과 유사하다. 강도는 약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한 5분쯤 지났을까. 입은 반쯤 벌어져 있고, 동공은 약간 풀린 체 일본 만화책에 나올법한 히키코모리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창문에 비쳤다.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슬리퍼가 내 발에 삽입되었다는 것을. 그렇게 그것은 내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 억지로 잡아당겨보고, 발을 털어도 보았다. 구레나룻을 위로 잡아 뜯는 고통의 37배 정도 되는 통증이 느껴졌다. 인터넷을 뒤졌다. 유튜브도 팠다. 슬리퍼 삽입, 슬리퍼 통증, 슬리퍼 발바닥 부착 등. 한 30분을 검색하는데 보냈다. 답이 나올 턱이 없었다.


오래전에 본 한 영화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던 소원이 떠올랐다. '나 결혼하고 싶어' 너무 얼토당토않는 말을 과하게 자연스럽게 말해 오히려 청자가 당황해하던 그 모습. 지금 내가 그랬다. 상황이 어이가 없어 현실감을 잠깐 잃었다. 하필 그때 왜 그 유튜브를 봤을까.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건강에 몰입했었는가. 이렇게 과거를 복기하다가는 결국 출생을 부정하게 된다. 불만 그만!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불만이라지 않았던가. 이럴 때일수록 담담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제 방법은 하나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렸다 병원에 가보든가, 지금 당장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향하든가.


어느 과를 가야 될까. '정형외과? 피부과? 혹시 신경 쪽이 문제가 있나? 의사들도 처음 보는 광경일 텐데... 혹시 소문이나서 tv 취재라도 나오면 어떡하지? 유명해지면 입봉작 출간할 때 조금 도움을 받을 수 있으려나...' 망상에 빠져들다 보니 잠깐 텐션이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직 걸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압각은 없었다. 약간 물컹한 느낌이 들어 아이러니하게도 걷는 맛이 났다. 살짝 굳은 연체동물 위를 걷는 느낌이랄까.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투명 망토가 있다면 여탕을 가보고 싶다는 소년들의 본능과 같은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벽에 발을 대보고 싶어졌다. 왠지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촉은 확실히 존재한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술자리에서 만난 이성이 내 옆에 앉은 녀석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감지했던 나의 촉은 언제나 적중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예상대로 나는 벽을 걸을 수 있었다. 어기적어기적 벽을 타다가 천장까지 걸어보았다. 피가 한쪽으로 쏠리고, 상의가 살짝 벗겨져 흉물스러운 배의 털이 보이는 단점만 없으면 그럭저럭 적응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다시 벽 쪽으로 내려와 바닥과 수평 하게 벽과는 수직이 되어 서 보았다. 방이 좁으니 침대 아래쪽 프레임과 손이 닿았다. 손으로 침대 프레임을 잡고 지탱하며 물구나무 비슷하게 내 몸을 가지고 놀다가 순간적으로 까치발을 들었다. 갑자기 접착력이 사라지자 나도 모르게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짝. 운이 좋았다. 발바닥이 먼저 땅에 닿았다. 


그 순간 돌들이 발에서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은 신을 때와는 반대였다. 사정 직후 평온함과 우울함을 동반한 멜랑꼴리한 기분. 강도는 역시 10분의 1 정도. 18 살았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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