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묵배미의 사랑(A Short Love Affair, 1990)
질펀했던 남녀의 체액과 채취가 묻어있던 우묵배미의 비닐하우스. 어느덧 찾아온 이별의 종착역. 헤어짐을 통보한 공례(최명길)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만다. 복잡한 이야기는 싫다던 일차원적인 인간 일도(박중훈)의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다. 악어의 눈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바람인 줄 알았는데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한 남자의 회한의 눈물이다. 이렇게 애달픈 그들의 사랑은 왜 불장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일도와 그의 식솔들은 일거리를 구해 서울을 떠난다. 아니. 떠난다라는 단어는 너무 능동적이다. 도시에 자리 잡지 못하고 겉돌다가 수동적으로 이렇게 된 것이니 그들에겐 방출당했다는 표현이 더욱 잘 어울린다. 이삿짐과 사람을 실은 트럭은 대한민국 성장의 상징인 올림픽 공원 옆 올림픽 선수, 기자촌 아파트를 지나 여의도 63빌딩을 경유해 마침내 서울 근교의 빈민가, 우묵배미에 도착한다. 곳곳에 논밭이 보이고, 유일한 유희 행위라고는 고스톱과 막걸리 한 사발에 춤판이 전부인 공간. 여기에 오면서 관통했던 빌딩 숲과 지금 이 휑한 벌판이 동일한 국가에 소속되어 있는 공간인가 싶기도 하다.
일도에게 우묵배미는 애증의 공간일 것이다.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애(愛)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실케 하는 증(憎)의 공간. 어설프게 서울 물먹고 와 빳빳한 양복 두르고 온갖 가오는 다 잡고 다니지만 집에서는 이미 권위를 상실한 매 맞는 남편일 뿐이고, 팝송이라도 좀 틀고 분위기를 환기시켜볼라 치면 그것을 꼬부랑 노래 정도로 치부하는 할머니들만이 그의 사회적 관계의 전부다. 그런 그의 인생에 불현듯 나타난 공례는 유일한 탈출구였을까.
'마음의 결정이 된 것 같아요' 무릎과 무릎 사이만큼이나 은밀한 미싱기와 미싱기 사이로 공례가 일도에게 전해준 쪽지에 적힌 말이다. 그들의 첫 일탈, 동침의 순간. 끝내 일도를 바람 맞춘 공례가 남긴 말은 '저는 마음의 결정에 시간이 오래 걸려요'였다. 눈앞에 팬티 바람으로 누워있는 남자와의 잠자리 여부에 대한 심사숙고.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샛길 사랑임을 인정했음에도, 모텔까지 따라들어와 양말 빨래만 하고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여인.
일도는 이와 정반대다.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성(性)을 대하는 남녀 태도의 차이를 감안한다 해도 일도의 행동은 이토록 저차원적일 수가 없다. 사랑의 수단으로써의 섹스가 아닌 섹스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듯 보이는 행동들. 첫 데이트부터 공례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파고 드려 시도하는 일도의 행위는 애당초 사랑을 빙자한 육욕이었다. 어쩌면 그는 태생적으로 사랑과 섹스 사이에 등호가 존재한다고 믿는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처(유혜리)에게 청혼 아닌 청혼을 하던 그날 밤도 일도는 헐벗고 있었지 않았는가.
일도에게 공례는 우묵배미에서 자신의 색깔로 물들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잠시 현실을 망각하게 하고 자신을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해방구이기도 하다. 일도 쪽에서 적극적으로 끌어당기니 이 사랑에는 일도의 영향력이 더욱 거대할 수밖에 없다. 공례는 첫날의 모텔방에서 브라운관을 통해 상영 중인 포르노를 매료된 듯 쳐다본다. 동침을 사양하고 있는 여인의 행동이라고 보기엔 다소 이질적이다. 어쩌면 슬슬 에로스에 빠져들기 시작한 순결한 여인의 모습.
공례의 결심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들의 진정한 첫날밤. 이번에 상대의 허벅지를 먼저 탐닉하는 손은 공례의 것이었다. 어쩌면 완전히 에로스에 빠져버린 순결한 여인의 모습. 봇물이 터졌다. 이후 이들의 사랑은 늘 육체 행위를 동반한다. 이렇게 이 사랑엔 일도 중심의 육체파 사랑만이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어느덧 공례의 진심이 혹은 공례를 향한 일도의 진심이 이 사랑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눈물이 바로 그 증거다.
막장 드라마에서나 봤을법한 이들의 시시콜콜한 사랑 이야기가 나에겐 조금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이들의 사랑은 도시의 맛을 맛본 남자와 세속에 찌들지 않은 여인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가부장제에 배반당한 남자와 가부장제에 뼛속 깊이 머물러 있는 여자의 사랑이기도 하다. 지역과 제도를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사랑 이야기.
결국 이 괴리는 둘의 사랑을 실패로 귀결시킨다. 교집합은 형성되지 못한다. 일도에겐 간극을 채울만한 '교양'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교양은 교육을 통해 함양된다. 교육의 기회와 수준은 부와 계층에 따라 불균등하다. 교육에 대한 인프라가 지금과 같지 않았던 90년대 초라면 그 차이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교양이 없다는 명제는 불가하겠지만, 가난은 교양 함양에 어려움을 줄 확률이 높다는 말은 가능할 것이다. 자신의 아이의 옹알이에도 단 한마디 아는 체도 않는 일도의 어린 시절은 불 보듯 뻔한다. 그에게 교양을 찾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일도 주변의 사람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재단 집 사장(이수찬)은 화장실을 자주 가는 공례에게 '방광 확인을 해봐야겠다'라고 농을 던지고, 비닐하우스에서의 애정행각을 발각한 최 씨(양택조)는 공례의 얼굴을 플래시로 비춰보더니 '맛있게 생겼네'라는 폄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바람난 남편을 찾으로 나온 부인에게 푼돈을 쥐여주며 입술을 훔치던 남수(최주봉) 같은 자는 또 어떠한가. 그들의 '이성 표백, 본능 충실'의 태도는 어느덧 교양 미달을 넘어 원시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원시적 인간들의 또 다른 행동 양상은 폭력성이다. 아니 이는 야만적이라는 수사가 더욱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일도에게 린치를 가하던 일도의 처도, 공례를 진흙탕 속에 처박던 그녀의 남편 석희(이대근)도 모두 일도와 동일한 층위의 인간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대관절 남존여비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혈혈단신 탈출해 몸을 팔게 된 기구한 여인에게 교양을 운운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발언이지 않을까.
<우묵배미의 사랑>은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교양을 미달시킨 근원적 동인은 어디에 있는가. 교양을 위한 나라는 존재하는 것인가.
공례는 일도의 결혼 후 벌써 네 번째 여자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했다. 공례가 떠나가도 일도는 또다시 외도를 할 것이다. 하지만 교양이 없는 그는 앞으로도 사랑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본편의 제목은 배일도의 사랑 혹은 민공례의 사랑이 아닌 우묵배미의 사랑이다. 우묵배미는 실제 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다. 없는 공간이 사랑을 한다는 모순은 그 사랑 자체도 무(無)로 수렴하게 만든다. 마치 영원히 반복될 일도의 불가능한 사랑 이야기처럼 공허하다.
★★★★ (별 4개)
교양을 위한 나라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