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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an 10. 2021

[단편소설] 삽입 된 슬리퍼 6

이창(Rear Window)


본문은 <삽입 된 슬리퍼 5 - 흐르는 여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zzyoun/91


  대한민국 대표 고시촌에 몇 년째 기거하고 있으면서도 고시원의 내부를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수는 내가 사는 원룸의 1/4 정도 남짓에 불과함에도 화장실, 침대, 책상 그리고 냉장고까지 나의 공간을 구성하는 물품들과 동일한 모든 것이 꾸역꾸역 다 들어가 있었다. 


'방이 작아도 그녀는 창밖의 나를 절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네 개의 차단막이 형성되어 있다. 첫째 창문은 침대 머리맡보다 다소 높게 위치해 있어 그녀의 시선이 쉽게 닿을 리 없다는 사실이고, 둘째 창문은 화장실의 불투명한 유리와 방의 벽 사이에 있어 어둑한 그늘이 져있기 때문이고, 셋째 혹시 눈길이 이쪽으로 스친다 한들 방충망에 먼지가 가득해 유심이 꿰뚫어보지 않으면 바깥의 형체가 보일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심적 측면인데 아니 누가 3층 창밖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상상이나 하겠는가. 


 다시 그녀에게 집중. 헐겁게 입은 여인은 그대로 책상에 앉아 랩탑을 켰다. 그녀는 이것저것 인터넷을 뒤적거린 뒤 영상을 하나 재생하고는 방의 불을 껐다. 허리를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양 다리를 벌려 책상 위 랩탑 사이에 두고 팔짱을 꼈다. '설마 내가 상상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그런데 굳이 불을 꺼야 될 이유가 있을까?' 이런저런 상상이 꼬리를 물던 순간 화면에는 예스러운 질감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방이 어둑해 영상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는데, 화면에는 서양인 남자가 다리가 부러진 체 침대에 누워있었고 그의 연인으로 보이는 전형적인 고전 헐리우드의 미인이 그와 대화를 나누는듯했다.


'어? 저 익숙한 얼굴 누구였더라?'


 내가 짐작한 그런 영상은 아니었다. 화면에서 보이는 건 분명히 나도 본 적이 있는 어떤 영화였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남자의 얼굴이 너무도 낯익었다. 나는 마치 극장 뒷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그녀와 함께 영상을 감상했다. 자막이 나오는 것을 보니 분명 유성영화일 테지만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고 자막까지 보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무성영화처럼 관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무리는 없었다. '훌륭한 감독은 무성영화처럼 찍는다고 했던가' 제목이 기억나진 않지만 저 영화는 분명 걸작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화면 속 다리를 다친 남자는 방에만 있기 무료했는지 기다란 망원경으로 맞은편 다른 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 저거... 유명한 장면인데...' 

그러니까 나는 지금 관음 하는 남자를 관음하고 있다. 


 그녀는 완전히 영화 모드에 돌입해 있는지라 더 이상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 슬슬 좀이 쑤셔왔다. 다리가 벽에 단단히 고정되고 팔을 창틀에 괴고 있다지만 그래도 오래 있기에는 불편한 자세다. 오늘의 등반은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판단해 슬쩍 다시 몸을 움직여 건물을 내려왔다. 다리가 바닥에 닿는 바로 그때 살랑거리는 바람이 전신을 훑었는데 그제서야 깨달았다. 온몸에 땀에 송골송골 맺혀있다는 사실을. 찰나의 순간 기화열에 체온을 빼앗기며 기분 좋은 시원함이 일었고 뭔가 대단한 난제를 풀어낸 것처럼 다리에 힘이 촥- 풀렸다.


 새벽 4시 반. 나는 장장 2시간 반을 벽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원래라면 발바닥에 충격을 주어 슬리퍼를 벗고 신발을 갈아 신어야겠지만 큰 소리가 날까 두려워 슬리퍼를 신은 채로 삼각지대를 빠져나왔다. 방금 그 건물에게 아니 어쩌면 그녀에게 모든 기를 빨려버린 것일까. 수백 번을 오가던 길이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공포스러웠다. 최대한 땅만 보면서 후다닥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이곳에 입성한 이래로 가장 깊고 길고 아득한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니 이미 해는 중천에 있었고 오후라고 말해야 될 시간이었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허기였지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새벽의 일이었다. 벽에 발을 대던 첫 순간을 기억했고 그녀의 모습을 반추했다. 


 이상하게도 반라의 형체는 기억이 흐릿했지만 그녀의 등 우측에 있는 Cinema라는 글씨만큼은 눈앞에 쓰여있는 듯 뚜렷했다. 필체와 글자 크기, 간격마저도 명확히 말이다. 불현듯 나의 하체로 심하게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들었고, 새벽녘 샤워 후 바닥에 던져놓은 물기가 마르지 않은 수건을 얼른 들고 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오늘따라 더욱 힘이 넘쳐보이는 나의 그것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그녀를 떠올리려 했으나 기억이 나지 않아 슬리퍼를 신고 있던 영상 속 아이돌을 떠올렸다. 그리고 또 그리며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 거짓말처럼 배우의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제임스 스튜어트'


 배꼽 아래의 일을 대강 수습한 뒤 얼른 제임스 스튜어트를 검색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펼쳤다.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 <멋진 인생>, <로프> 내가 본 그의 영화를 눈에 바르면서 넘기던 중 한 영화가 눈을 사로잡았다. <이창>. 이제 기억이 났다. 그녀가 보고 있던 것은 히치콕의 걸작 <이창>이었다. 도장 깨기 하듯 영화사 걸작을 하나하나 독파하던 시절이 있었다. 입대하기 전 막 대학에 입학했던 20대 초반. 그녀의 추정 나이와 비슷한 그 시기 즈음에 말이다. 그녀에게 정서적 동질감이 확 짙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의 고질병인 '금사빠'가 발동했다.


 '취미가 맞으면 축복받은 커플이라고 하던데, 어쩌면 그녀는 나의 천생연분?!'




7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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