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ene Sofia Schjerfbeck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
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
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허수경,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中
헬레네 셰르프벡은 오래된 영혼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녀의 자화상은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이 우리의 쇠락함이 아니라 구태의연한 모든 것들의 퇴적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오래되었으나, 그녀의 영혼은 계속 그녀의 것이다.
헬레네 셰르프벡 Helene Sofia Schjerfbeck은 핀란드 아트 소사이어티에서 커미션을 받는 인물화가 9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그린 자화상은 렘브란트 반 레인 Rembrandt van Rijn과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프리다 칼로 Frida Kahlo와 비견될 정도로 유의미한 평가를 받는다.
자화상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50세 이전, 50세 이후, 죽기 전 2년(85세에 사망). 특히 마지막 2년 동안 그렸던 다소 기괴한 모습의 자화상들이 자주 거론되는데 이 작품들을 근거로 셰르프벡은 "핀란드의 뭉크"라 불리기도 한다. 그녀가 이 칭호를 달가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뭉크의 그림을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의 감정은 뭔가 나를 따돌린다. 하지만 여성은 다르게 느낀다."
셰르프벡은 자신이 그려낸 감정은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녀의 그림을 통해 우리의 여정을 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내 초상은 죽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화가는 이렇게 혼을 들춰낸다. 내겐 다른 방도가 없다. 나는 무언가 더 어둡고 더 강렬한 표현을 찾고 있다."
자신이 말한대로, 셰르프벡은 천천히 육체를 쓸고 혼을 드러낸다. 영혼을 보기 위한 방법적 침식(浸蝕)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침식은 우리 눈(eyes)에 익숙한 것들과 우리의 간편한 이해를 지울 뿐, 존재를 지우는 사건은 아니다. 기괴하고 공포스럽지만 침략당한 세월의 기록도 아니다. 셰르프벡의 그림은 우리가 투쟁으로 닳고 닳았을 때, 그 피로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그리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그녀가 경험했던 개인적, 사회적, 육체적 피로에 대한 예찬은 결코 될 수 없다.
하지만 노령의 피로는 완전히 달라. 자유롭기도 하거든. 뭐든 알아서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있기 때문에, 붓의 예민함 말고는 남는 게 없어.
- 1926.11.28, 친구 에이나 뢰이테르(Einar Reuter, 핀란드의 작가이자 미술 평론가)에게 쓴 편지
폰 본스 도르프(Von Bonsdorff)는 그녀의 자화상을 비웃고 그것을 자기 방어적 회피로 보았다 -셰르프백은 속속들이 들키고 싶지 않아서 호기심 많은 방문객들을 실망시키기로 작정했다고. 그러나 그녀의 자화상은 필멸에 대한 탐구다.
케이트 켈라웨이 Kate Kellaway, 영국 가디언지 '핀란드의 뭉크: 헬레나 셰르프벡의 불안한 예술'에서 ('Finland’s Munch’: the unnerving art of Helene Schjerfbeck)
20세기 가장 중요한 화가, 핀란드 최고의 모더니스트 화가로 불리는 헬레네 셰르프백은 핀란드 헬싱키Helsinki에서 태어났고 스웨덴 솔트회바덴Saltsjöbaden에서 죽었다. 네 살 때 계단을 헛디뎌 엉덩이를 다치지만 치료를 받지 못해 평생 장애를 지니고 살았다. 몸이 허약해 홈스쿨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에게 자유를 준 것이 바로 그림이었다. 11살에 특별 장학생으로 핀란드 예술 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재능이 특출했으며, 18살에는 예술 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있던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며 그림을 공부했다.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명화들을 따라 그리며 그림을 배웠다.
기법이나 시각 기억 능력이 탁월하여 핀란드 아트 소사이어티의 의뢰를 받아 세계 명화를 모사하는 일을 했으며 자연주의 화가로서도 명성을 얻었으나, 헬싱키로 돌아온 이후엔 자연주의의 틀에서 벗어나는 실험을 시작했다
셰르프벡은 예술과 문학 이론에도 관심이 많았다. 샤를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와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의 작품을 읽었고 그들이 주장한 "예술을 위한 예술"을 궁금해했다. 또, 프랑스에서 나오는 패션 잡지를 정기적으로 사 볼만큼 스타일과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녀의 많은 작업이 패션에 대한 당시 셰르프벡의 흥미를 잘 보여준다.
1884년 셰르프벡은 재정적 안정을 위해 핀란드 예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지만, 1902년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와 함께 핀란드 히빙카 Hyvinkää로 떠난다.
어떤 약속도 이젠 할 수가 없습니다. 병약한 여성은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붙잡고 씨름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헬레네 셰르프벡, 1924년 4월
1944년, 전쟁으로 핀란드가 대규모 폭격을 맞은 직후 스웨덴 국적을 갖고 있던 아트 딜러 유스타 스티엔만 Gösta Stenman과 함께 스웨덴으로 피난을 간다. 그녀 나이 83세였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마땅히 그릴 모델이 없었던 셰르프벡은 이때 유독 더 많은 자화상을 그린다.
유스타 스티엔만 Gösta Stenman(1888-1947)은 그의 나이 서른에 핀란드 히빙카 Hyvinkää 에서 셰르프벡(당시 50세)을 만난다. 그는 예술에 눈이 밝은 사업가이자 콜렉터였다. 1937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셰르프벡의 두 번째 솔로 전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그녀에게 매달 꾸준한 수입과 작업에 필요한 모든 도움을 제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1938년, 스티엔만은 셰르프벡이 재정적 이유로 시도하지 못했던 석판화(리소그래피)를 권유하고 이를 지원한다.
재능과 노력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그녀였지만, 쉰이 될 때까지 솔로 전시를 열지 못했고 여성 예술사가들이 여성 아티스트들을 발굴해내기 전까지(대략 1980년까지) 그녀의 이름은 세대주로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북유럽의 다른 유명한 예술가들(크리스티안 쿠크 Christian Købke, 빌헬름 함메르쇠이 Vilhelm Hammershøi, 페어 쉬르케비 Per Kirkeby , 올라퍼 엘리아슨 Olafur Eliasson) 중에서도 가장 늦게, 가장 덜 알려진 아티스트이다.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참고 사이트
https://yle.fi/uutiset/osasto/news/opera_film_on_artist_helene_schjerfbeck_due_in_2020/10733885
https://www.uppsalaauktion.se/special/helene-schjerfbeck-collection-stenman/
https://www.uppsalaauktion.se/en/incontext/self-portrait/
http://www.artnet.com/artists/helene-sofia-schjerfbeck/2
https://jamanetwork.com/journals/jamapsychiatry/fullarticle/1660048
http://www.bbc.com/culture/story/20190731-the-artist-in-search-of-the-essence-of-life
http://schirn.de/schjerfbeck/en/
참고 도서
Helene Scherfbeck, Royal Academy of Arts 출판
Helene Scherfbeck Techningar ock akvareller by Lena Holger and Raster Förlag
제목의 배경 이미지
1945년의 자화상
*아트렉처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