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20090409 니시타니 히로시 作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한국에서는 2009년에 일본판이 개봉했고, 2012년에는 이요원, 류승범, 조진웅 주연으로 한국 리메이크판이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2009년 일본판 영화를 본 적이 있었고, 대강의 줄거리만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는 상태에서 근 10년만에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본 리뷰에는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초반, 유카와 교수는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며 가우스 가속기 실험을 보여줍니다.
레일 위의 쇠공에 같은 크기의 쇠공을 부딪히면, 반대편에 있는 쇠공이 동일한 속도로 굴러간다. 운동량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 때문이다. 쇠공 대신 네오디뮴 자석을 붙이면, 쇠공은 부딪히기 직전에 자석에 강하게 끌려가며 순간적으로 속도를 높이게 되고, 그만큼 튀어나가는 쇠공의 속도도 빨라진다.
-《용의자 X의 헌신》 中 유카와 교수의 대사
마지막 쇠공이 움직이는 '현상'이 일어난 원인은, 첫번째 쇠공이 특정한 속도로 굴러와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현상-원인의 결합이지요.
같은 실험을 조금 다르게 반복합니다. 첫번째 실험에서 또르르 굴러가던 마지막 쇠공이, 이번에는 갑자기 총알처럼 빠르게 쏘아집니다. 이처럼 마지막 쇠공의 속도가 달라진 이유는, 줄지어선 쇠공 대신 네오디뮴 자석을 사용해 실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완성탄성충돌과 운동량 보존의 법칙. 첫 번째 실험에서 쇠공이 굴러가는 것과 같은 원리일 뿐이지요. 그러나 네오디뮴 자석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 현상을 본다면, 이 간단한 과학실험은 놀라운 마법처럼 보일 것입니다.
《용의자 X의 헌신》 은 이처럼 변수를 교묘하게 바꾸어 수식 전체를 뒤틀리게 하는 천재 수학자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의문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시체는 ‘토가시 신지’라는 남자의 것으로 밝혀졌고, 경찰은 그의 전처인 ‘야스코’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합니다.
그러나 시체의 사망추정시각인 12월 2일 저녁, 야스코와 그녀의 딸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경찰은 그녀의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지만, 그들의 알리바이는 완벽하지요.
경찰이 해결하려고 애쓰는 ‘수식’에서 그들이 고려하는 변수는 두 가지 입니다. 야스코와 그녀의 딸의 알리바이, 그리고 토가시 신지의 죽음.
야스코의 옆집에 사는 남자 이시가미, 사망자 토가지 신지가 묵었던 모텔방, 그의 사망추정시각 등 여러가지 단서들은 전제조건처럼 문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치 수학 문제에서 “단, 모든 변수는 양의 정수이다” 라고 전제조건을 다는 것처럼 말이죠.
애초에 경찰은 이 수식을 절대로 풀 수가 없습니다. 경찰이 ‘상수’로 취급했던 옆집남자 ‘이시가미’가 사실은 이 수식의 가장 중요한 변수 x였고, 그 x에 의해 모든 전제조건들이 뒤틀려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변수와 상수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종종 수학문제를 풀다가 변수와 상수를 구분하지 못해 실수를 했습니다. 변수가 x, y 등의 문자로 표기되고, 나머지 상수가 숫자로 표기되어 있는 식이라면 변수와 상수의 구분은 쉽습니다.
그러나 a, b, c, x, y, z 등 문자가 여럿 등장하는 식에서, 어떤 문자는 우리가 구해야 할 미지수(변수)이고, 또 어떤 문자는 임의의 상수를 표기한 것이라면 그때부터 저의 회로는 꼬이기 시작합니다. 만일 변수 하나를 상수로 착각하고 수식을 푼다면, 계산 결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가우스 가속기에 쇠공과 똑같은 생김새의 네오디뮴 자석을 설치했듯이, 이시가미는 자신의 존재를 숨겨 마치 마법 같은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유력한 용의자 야스코와 딸은, 시체의 사망추정시간에 분명히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범이라면,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마법을 썼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변수 x, 즉 자기 자신을 상수로 위장하여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든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 그리고 그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 교수.
이시가미는 어느 날 의미심잠한 힌트를 던집니다.
“단순한 함정 문제입니다. 기하문제로 보이지만 함수문제라든지. 조금만 시각을 바꾸면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 《용의자 X의 헌신》 中 이시가미의 대사
이 이야기를 듣고 유카와 교수는 이야기의 모든 전말을 알아차립니다.
경찰이 풀어야 할 문제는 ‘용의자 야스코와 그의 딸의 알리바이가 진짜인가’ 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풀어야 하는가’ 자체가 틀렸던 것입니다. 사실은 알리바이가 아니라 시체 자체가 문제였고, 이 모든 것을 꾸민 변수 x, 이시가미의 행적이 문제였습니다.
ax^2+bx+c = 愛 이런 문제는 아무도 풀지 못하지.
- 《용의자 X의 헌신》 中 유카와 교수의 대사
수학 방정식에 수학적이지 않은 요소가 포함되면 우리는 그 식을 풀 수 없습니다.
야스코를 향한 이시가미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옆집에 사는 남자인 이시가미가 야스코의 범죄에 동참할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시가미가 변수(용의자) x가 된 이유도, 그리고 용의자 x가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들기 위해 ‘헌신’을 한 것도 전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기하문제를 함수문제로 보이게 한' 이 사건의 가장 큰 함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