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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Mar 27. 2024

'이리역 폭발'과 '5.18 실종자 문제' 연결점 있다

익산역의 성판매 여성들과 광주의 빈민들은 어떻게 지워졌나

 며칠 전 SBS '꼬꼬무'가 1977년 11월 11일에 있었던 '이리역 폭발 사고'를 다뤘다.


 그런데 이 사건의 잘 알려지지 않은 정황들을 살펴 보니, 대단히 쎄한 느낌이 든다. 이 사건이 '5.18 실종자 문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 같다는 의심이 든다.


 사건 개요는 단순하다. 한국화약 측 폭발물을 싣고 이리역(현 익산역)을 지나던 열차가 각종 안전 규정을 어기고 이리역에 정차하게 됐다. 이후 열차 호송원 신무일씨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열차 안에 켜 놓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상자에 옮겨 붙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발로 인해, 59명이 사망하고, 1343명이 부상을 입었다. 가옥 811채가 전파됐고, 780채가 반파됐다. 당시 기준으로 61억 원 상당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1977년에 이 정도 피해가 발생했음을 감안하면 이 사건은 정말 거대한 재앙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보고 사건 관련 기록을 살피니, 의문 부호가 하나 떠오른다. 가옥 811채가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규모가 59명에 그친 점이 의문스럽다. 사건을 경험한 이리시(현 익산시) 주민들은 이 사건 사망자가 당국의 집계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주장한다. 당시 이리역은 호남권 교통의 요충지로 신원이 불분명한 타지인들이 많이 오갔고, '성매매 업소 밀집지'가 있어 그곳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많이들 희생되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3일 후인 11월 14일 <매일경제>가 현재까지 발생한 인명피해라며 사망자 47명, 실종자 9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 명단에 포함된 실종자 9명은 사망자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명단에는 사망자 59명 중 56명이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 명단을 자세히 살펴 본 결과, 20·30 여성으로 보이는 희생자는 많게 봐도 3명 정도로 보였다. 사고가 발생한 곳은 판자촌과 홍등가가 난립했던 슬럼 지역이었고, 거대한 폭발로 인해 지름 40m, 깊이 15m에 달하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이고 반경 500m 이내에 위치한 건물들이 전파되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음을 감안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명단이다.


사건 발생 3일 후 매일경제 집계.


 소설가 박범신은 본인의 작품 <더러운 책상>에서 이 의문점과 관련된 언급을 한다. "철인동 사창가 언덕이 인구가 젤 조밀했던 곳이었어요. 색시들이 어떤 사람은 천 명도 훨씬 더 됐을 거라고도 하고요. 한순간 모든 것이 폭삭한 거예요. 고향도 모르고, 가족도 없고, 그러니 어떻게 사망확인이 됩니까. (중략) 익산시가 이만큼 발전하게 된 것, 다 폭파사건 덕분이라고 봐요. 왜정 때부터 있어온 삼남 최대의 사창가가 하루 한순간 사라진 것도 그렇구요."


 이번 SBS '꼬꼬무' 방송 역시 이 같은 지점을 언급했다.


 "이리역 참사의 공식적인 사망자는 지금 59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리 사람들은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고 기억해.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들은 공식 사망자에서는 제외가 된거야. 교통 거점이었던 이리역 주변은 워낙 많은 타지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었고, 역 근처엔 이름 모를 여인들 수백 명이 일하던 홍등가도 있었어. 오래 전에 집을 떠나서 그곳에 정착을 했던 여성들. 연고가 없는 유해들은 그렇게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거야."


 이 같은 '사건 은폐'를 주도한 건 누구였을까?


 당연히 박정희 정권이었다. 이 사건 당시 한국화약(한화) 김종희 회장은 당시로서는 현직 4선 국회의원이었던 김종철 민주공화당 의원의 동생이었다. 김종희 회장의 차남은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의 고명딸과 혼인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사돈지간이었다. 박 정권으로서는 민습 수습을 위해서라도 빠른 사건 정리가 필요했다.


 지난 2017년 이리역 폭발 사고 시민백서가 발간됐다. 해당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사고 후 국가와 군대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주도하면서 마치 도시 전체가 군대가 된 상황이었고 시민들도 일사분란하게 군대처럼 움직였다. 사망자 공식기록도 불분명하고 희생자나 사망자 사진이 없고, 현수막에 '박 대통령 각하 감사합니다' 문구가 보이는 사진들이 주로 남아있는 상황이어서 국가와 이리시가 사고를 기억하는 방식이 의아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리역 사고로부터 14일이 지난 11월 25일 새이리 종합개발계획을 발표하고 일사천리로 피해 복구 작업을 진행했다.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지난 2022년 익산시의회에서 자유발언에 나선 임형택 익산시의원은 이를 지적하며 "(박정희 정부의 개발계획 발표로) 사건의 진실, 책임은 모른 채 일사천리로 복구작업이 진행되면서 결국 기억에 남은 건 새이리건설 구호뿐인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 보니 이리역 폭발사고는 사회적 참사가 아닌 도시발전의 기재로 기억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리역 폭발 사고의 중요성은 인지하고 있으나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기저의 사고가 깔려있는 것으로 사람은 없고 도시만 기억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참고로 이리역 폭발 사고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었는데, 이름은 익산군이 가져갔다. 이리시 폭발 사고가 전국에 준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리시 폭발 사고' 당시 사고 현장에 투입돼 사고를 수습한 군부대는 어디일까? 지금 현재에도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주둔하고 있는 '7공수여단'이다.


 그렇다, 7공수여단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5월 18일 새벽에 전남대학교를 점령하며 광주에 진주한 5.18의 첫 점령군이었다. 이들은 광주항쟁으로부터 몇 년 전 발생한 '이리역 폭발 사고' 당시에도 사고 수습을 전담했다. 이 사고는 박정희 정권이 무척이나 신경쓰고 있던 사고였다. 당시 사고에 휘말렸던 개그맨 이주일씨 역시 자신이 7공수여단 측에게 구출됐음을 증언한 바 있다.


 사망자 숫자 은폐로 상당한 논란이 있던 '이리역 폭발 사고'를 수습한 7공수여단이 마찬가지로 사망자가 은폐되고 상당한 실종자가 발생한 5.18에 투입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과거의 경험은 늘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준다. 5.18 당시 신군부는 이리역 사고 당시의 경험을 5.18 문제 해결에 녹여내고자 했다. 그래서 이리역 사고 당시 박정희가 이리시를 방문한 점에 착안해 최규하에게 광주에 방문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게다가, 7공수여단의 역할은 명백히, 광주에 투입된 다른 부대들과는 달랐다. 7공수여단은 5.18 당시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한 부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부대로 보인다.


 2018년 5월 17일자 <경향신문> 단독 보도에 따르면 1980년 5월 27일에 있었던 전남도청 진압 작전 직후 광주에 투입된 3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은 즉시 원대 복귀했다. 그러나 7공수여단은 광주를 떠나지 않고 최소 10일간 광주에 남아 있었다. 이들의 행적은 전투상보 등 일반문서에서는 일절 확인되지 않는다.


 기사에도 언급된 5.18연구자 안길정 박사는 "5.18 이후 광주에 남은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뭘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그동안 본 적이 없다"며 "특전사 전투상보 등에도 5월27일까지만 나온다. 7공수가 광주에 남아 공수부대가 저지른 일에 대한 뒤처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10일 동안 무엇을 했는지 밝히는 것은 5.18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5.18 이후 신군부 측 전교사는 '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이라는 문건을 만들어 진압작전 직후인 5월 27일 3공수와 11공수가 즉시 원대 복귀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7공수여단은 6월 6일이 되어서야 원대 복귀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광주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이들은 헬기를 이용해 무등산 깊숙한 곳으로 이동해 작전을 폈다. 5월 29일자 육군 항공여단 작전일지에 'UH-1H' 헬기 1대가 무등산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날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에 무등산 깊은 곳에 공수병들을 3차례에 걸쳐 내려주던 중 헬기 사고가 나서 공수부대원 2명이 부상을 입었다. 항공여단 작전일지에 나오는 좌표에 따르면 그곳은 무등산의 깊은 산중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장이었던 나의갑씨는 "7공수가 광주에 남아 무등산에서 작전을 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들이 뭘 했는지를 밝히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암매장' 문제 등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거의 경험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분명 현재와 미래의 어느날 활용되곤 한다. 1977년 11월, 그러니까 1980년 5월로부터 2년 6개월 전에 발생한 '굉장히 많은 사망자 수가 은폐·축소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을 처리했던 부대가 역시나 같은 지점에서 의문점이 있는 사건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 신군부 역시 5.18 당시 과거의 이리역 사건 경험을 활용한 바 있었다.


 '사망자 숫자'를 줄이는 건 정치적으로 굉장히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만약 이리역 사고의 사망자가 243명이었다는 발표가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2024년의 한국인들은 분명, 이 사건을 지금과는 다른 크기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5.18 역시 마찬가지다. 사건 직후 광주지검이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공표했었다면 당대의 시민들은 물론 현재의 시민들 역시 이 사건을 좀 더 크게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건 모두에서 무척이나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 어느 부대의 수상했던 행적이 굉장히 의심스럽다.


 최근 5.18진상조사위는 5.18 당시 사망했음이 명백해 보이는 행방불명자를 179명으로 특정했다. 이는 5.18 공식 사망자 166명보다도 많은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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