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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 국민의힘 전남도당위원장이 만든 올림픽 금메달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by 김동규

최근 대구 중앙떡볶이를 먹기 위해 대구에 다녀왔다.


농담이고, 정치 커뮤니티 플랫폼 폴티가 기획한 <지역주의자>에 사회자로 참여하게 되어 다녀왔다. 이번 촬영분의 출연자는 김화진 국민의힘 전남도당위원장과 허승규 안동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었다.


허승규 위원장의 경우 경북 안동에서 녹색당 안동시의원 후보로 출마해 상당한 득표를 했고 다음 지방선거 때에도 같은 도전을 한다. 지난해 총선 때 녹색정의당 비례대표 후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행적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화진 위원장에 대해선 잘 몰랐다. 최근까지 출연했던 <김광진의 펀치펀치> 방송에, 내가 출연하지 않은 날 출연한 패널 정도로만 알았다. 그러다가 이번 <지역주의자> 기획에 참여하게 되면서 호남 국민의힘 인사를 찾다가 섭외하게 됐다. 솔직히 말해서, 논란이 적었다. 호남 내 인물난의 영향인지 국힘 호남 인사들은 하나 같이 망언 이력을 비롯한 각종 논란이 있었다. 그래서 김화진 위원장을 고르게 됐다.


근데, 대구까지 같이 이동하면서 대화해 보니까 꽤 재밌는 사람이었다.


김화진 위원장은 1976년 전남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체육교사를 지향했고, 그런 쪽에 능력이 있었다. 당시는 5.18 전이라 5월이면 전남대 용봉축제가 열렸다. 이때 용봉장사를 뽑는 꽤 규모 있는 체육행사도 있었는데, 그는 1학년 때 준우승을 했고 이후 1979년까지 내리 3년간 용봉장사에 등극했다. 우승자에겐 염소를 주었다고 한다.


대학 말미엔 유도 특기를 살려 경찰들을 대상으로 유도 사범 일을 했다. 5.18민주광장에 위치한 상무관에서 경찰들에게 유도를 가르치는 일은 그의 일상 업무 중 하나였다.


이후 김화진은 1980년에 해남중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광주를 떠나게 되어 5.18과 특별한 접점은 없었고, 전교조 활동 전까진 평범한 교사였다고 한다.


김화진은 해남중 교사가 된 후 학교에 레슬링부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때 우연히 눈에 들어온 학생이 있었다. 가르치면 잘 할 거 같았다. 그래서 대화해 봤는데 가정형편 때문에 어려울 것 같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김화진은 그 학생을 3년간 자기 집에 데려와 먹이고 재우며 가르쳤다.


그 학생의 이름은 안한봉이었다. 안한봉은 레슬링 국가대표가 되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금메달을 딴 후에는 언론 인터뷰에서 김화진 선생님에게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다. 안한봉은 결혼을 할 때 김화진을 주례로 불렀다. 김화진의 회갑연도 친구들과 마음을 모아 준비했다. 여담이지만 안한봉의 결혼식에는 이건희 전 삼성 회장도 참석했다고 한다. 이건희가 젊은 시절 레슬링에 심취한 적이 있었고 당시 안 선수가 삼성생명 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꽤 괜찮은 교사였던 김화진은 뭐랄까, 의리를 중시하는 남성성 넘치는 체육교사였던 걸로 보이는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와 스타일은 다르지만 좋게 생각되긴 했다.


의리 때문인지, 그는 전교조에 가입해 활동했고 분회장까지 맡아 해직교사가 됐다. 해직교사 김화진은 1991년 지방선거 부활로 지방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열리자 광주 서구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는 현재의 광주 서구와 남구가 모두 서구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의원 숫자가 꽤 많았지만 김화진은 의회 운영위원장으로 뽑혔다. 이때 했던 일 중 대구 동구의회와의 교류가 있었다. 대구에 가서 의원들을 만나고 친선하고 일도 같이 했다. 지금도 존재하는 영호남 교류의 원류 느낌이다.


재밌는 건, 대구에 가서 보니까 대구 동구의회에는 사업가나 지역 유지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대구 구의원들은 각그랜저 등 좋은 차를 타고 왔다. 거즘 그랬다. 그러나 당시 광주 서구의회에는 자가용 차량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의원들이 대부분 운동권 및 재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얘기였지만 흥미롭다.


이후 김화진은 1998년 지방선거 당시 광주 남구의원 후보로 출마해 38.21%를 득표해 6명 중 1위로 당선됐다. 그 선거 앞뒤로는 광주시의원 후보로도 출마했지만 최대 33%를 득표했음에도 당선에 이르진 못했다. 그러나 무소속으로 1명만 뽑는 광역의원 선거에 도전해 33.85%를 득표한 건 대단한 일이다. 아침마다 하는 학교 앞 교통 봉사만 10년 이상 했다고 하니 지역에서 열심히 하긴 했던 것 같다.


김화진은 광주 남구의원 시절 광주 불로초등학교 교가를 작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진짜인가 싶어서 확인해 봤는데 불로초 홈페이지에서 팩트로 확인된다. 광주 불로초는 현재 광주 부동산 시장 및 봉선학군의 핵심이다.


광주 부동산의 핵심인 네임드 초교의 교가를 작사한 게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 현 국민의힘 정치인인 게 무척 흥미롭다. 불로초 투표소는 2022년 대선 당시 큰 화제가 됐다.


2022년 대선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이 학교에 마련된 봉선2동 제5투표소에서 38.77%를 득표했다. 광주에서 윤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투표소가 위치했던 곳이 불로초였던 것이다.


김화진은 2006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광주 남구청장 후보로 선거를 완주했다. 이때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전화해서 동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물론, 그에게만 한 전화는 아니었겠지만 본인은 대통령의 말을 선거 완주 요청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이때 광주는 역시나 민주당이 모두 이겼고, 노무현의 여당 열린우리당 후보였던 김화진은 28.7%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김은 7번 출마한 선거 중 5번을 무소속으로, 1번은 열린우리당 후보로 완주했다. 광주에서 이렇게 활동했지만 결국 민주당으로 선거를 완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2024년엔 결국 국민의힘에 가서 비례대표 22번을 받아 낙선했다. 18번까지만 당선됐다.


전남대 나와서 교사 하다가 전교조 분회장 활동으로 해직되었고 기초의원 선거에서 발로 뛰는 정치로 2번 당선되고 낙선한 선거에서도 상당한 득표를 한 걸 보면 만약 민주당에 가서 몇 번 경선에서 지더라도 계속 활동했다면 시의원은 물론 구청장까지도 노려볼 수 있었을 것 같다. 여담이지만 그가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섰던 2006년 지선 당시 무소속 최영호 광주 남구청장 후보는 선거를 완주하지 못하고 사퇴했다. 그러나 2010년 민주당 공천을 받아 광주 남구청장이 됐다.


김화진은 사람 자체가 권모술수에 능한 타입은 아니고 그냥 옛날 남자 스타일의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체육교사 하다가 불의에 분노하고 의리도 지키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 같다. 여우였다면 달랐겠지만 그렇지 않고 가식적이거나 계산적인 사람은 아닌 거 같았다.


전교조를 그만둔 건 전교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해서라고 했다. 노조가 너무 정치 쪽으로 기울어서 싫었다고 했는데, 생각의 차이도 있겠지만 국민의힘과 어울리는 인식도 꽤나 갖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 사람에게 표를 주진 않겠지만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나니 재밌어서 기록하듯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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