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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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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Jan 01. 2017

#3. 남쪽을 향해 달리는 차 (1)

2014.09.04. 나미비아

매주 '무형의 꽃'을 읽어주시고 인생의 소중한 추억 일부를 타인이 주관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흔쾌히 동의해 주신 '아주머니'와 친구로 남아 종종 술잔을 기울이는 미에 현 거주자 '스즈키 유키' 형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번 장은 스즈키 유키 형의 도움으로 집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지구 상에서 인류가 경작을 하며 생활하는 대륙을 총 여섯 개로 나누며, 면적 순으로 늘어놓으면 아시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유럽,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순이 된다. 이 중 첫 번째 대륙에 위치한 국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서남서쪽으로 약 13,20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두 번째 대륙에 위치한 국가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가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과 다르게 사막으로 둘러싸인 빈트후크는 연중 온화한 기후를 보이며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또한 19세기 말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시절의 여파로 옛 독일풍 건물들을 볼 수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연결되는 기나긴 철도가 빈트후크 중심부에 위치한 트랜스나미브 기차역을 관통하는데 바로 이곳에서부터 남쪽으로 에로스 공항 인근까지 ‘만덤 드머파요 애비뉴’라는 왕복 6차선 도로가 이어진다. 만덤 드머파요 애비뉴가 ‘처치 스트리트’와 갈라지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보이트 스트리트’에 위치한 여행자 숙소 ‘카멜레온 백패커스’ 내에서 한국에서 온 여행자 세 명과 일본에서 온 여행자 세 명이 머리를 맞대고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지금 막 중요한 결정 하나를 마치던 참이었다.

 “그러면 차는 SUV에 수동으로 하고, 우선 운전은 될 수 있는 한 일본 사람들이 하는 걸로 하죠.”

 일본에서 간호사 일을 하다가 작년에 여행을 떠나와서 이번에 나미비아와 케이프타운을 여행하고 일본에 귀국하겠다고 밝힌 타카코 반노 누나가 인터넷으로 렌터카 검색을 하다가 SUV 차량과 우리가 원래 빌리려던 형식인 이륜구동 차량에 비해 가격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같이 여행을 떠나는, 타카코 누나가 아닌 유일한 일본인인 스즈키 유키 형도 이에 동의했다. 우선 운전은 타카코 누나와 유키 형이 번갈아서 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특수 상황에는 수동 운전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면허는 있는 한국인들이 하는 것으로 정했다. 적지 않은 부담을 일본 사람들에게만 넘긴 것 같아 내심 마음이 불편했는데 유키 형은 꽤나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자동차 정비공을 하다가 올해 1월에 출국하여 유럽 쪽을 돌아다니고 여기까지 왔으며, 운전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 타카코 누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명의로 2014년 9월 5일부터 2014년 9월 11일까지 7일간 차를 예약했다. 비용은 45만 원 정도였다. 현재 시계는 12시에 가까운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돌아다니면 잠은 어디서 자?”

 “에토샤 국립공원 같은 경우에는 텐트를 가져가는 게 좋을 거예요. 야영장이 있어서 텐트 치고 자야 할 겁니다.”

 쇼고 씨는 자신의 원래 직업이 비행기 조종사라고 했는데, 이 나라의 관광에 관련된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술술 대답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보다는 이곳의 가이드이거나 그 비슷한 수준의 사람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 아저씨 부부, 타카코 누나, 유키 형, 그리고 나까지 모두 쇼고 씨를 통해서 이어졌다. 혹시 부업이 나미비아 관광청의 숨은 직원이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텐트는 빌려야 하나요?”

 “빌려서 쓸 수도 있는데, 사실 차이나타운에서 사는 게 더 싸요. 비싸고 질 좋은 텐트를 빌리느냐, 아니면 값싸고 별로 안 좋은 텐트를 사느냐의 문제죠.”

 “그러면 저는 우선 제 숙소 갔다가 돌아올게요. 저는 텐트 가지고 있어서요.”

 타카코 누나는 그 말을 하고는 3시 정도에 다시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우선 텐트 문제를 해결하고 다 같이 장을 볼 계획이었다.


 “차이나타운까지 얼마예요?”

 결국 우리는 텐트를 빌리는 대신 저렴한 값에 사기로 했다. 유키 형과 나는 딱히 잠자리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경제적인 여행을 선호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1인당 20 나미비아 달러요.”

 숙소 앞에서 잡은 택시의 기사 아저씨가 대답했다. 이미 일행들은 거의 다 택시에 올라 있었다.

 “1인당 10달러면 된다고 들었는데요.”

 쇼고 씨에게 들은 말을 토대로 반론했다. 그는 분명 “택시로 차이나타운까지 1인당 10 나미비아 달러면 갈 거예요.”라고 했다. 역시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다.

 기사 아저씨는 손을 내저었다.

 “거기에서 시내로 오는 건 10인데, 가는 건 20이에요.”

 뒷자리에 앉았던 아주머니는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다 내려.”

 나는 흥정에 들어갔다.

 “이봐요. 10달러로 가죠.”

 “휴우, 그래요. 10달러씩으로 갑시다.”

 택시는 북쪽으로 10분 이상을 달린 뒤 마치 허허벌판 같은 곳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너무 주변이 황량하고 황토색이 가득하여 허허벌판이라고 표현했지만 1층짜리 건물들로 구성된 상가들이 한쪽에 있었고 거리에서는 소시지와 돼지고기를 석쇠 위에 구워서 팔고 있었다. 딱히 차이나타운이라고 바로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이유는 거리에서 고기를 파는 사람들이 모두 흑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상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자세히 보니 황인과 흑인이 섞여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 주변을 둘러보던 우리를 향해 입을 열였다.

 “80달러요.”

 이게 또 무슨 말이야.

 “1인당 10씩 이라면서요. 여기 40이요.”

 기사 아저씨는 손을 뒤로 뺐다.

 “1인당 20씩이라고 했잖아요.”

 “10씩 받겠다면서요.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고, 언성은 계속 높아졌다. 우리는 옆에서 구경하던 중국인 한 명을 붙잡아서 설명했다.

 “아니, 글쎄. 이 기사 아저씨가 분명히 10달러씩 받기로 해 놓고 20을 달라고 하네요.”

 “어디에서부터 왔는데요?”

 “카멜레온 백패커스요.”

 얘기를 들은 중국인은 기사 아저씨와 무어라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들끼리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1인당 15 나미비아 달러, 총 60달러를 내기로 합의를 봤다. 한화로 약 6,000원인데, 그래도 한국 택시비와 비교하면 그런대로 저렴한 편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주목하던 그 난동이 끝난 이후, 일행은 내린 곳 바로 앞에 있는 가게를 들어갔다. 텐트의 가격은 2인용 120 나미비아 달러, 4인용 160 나미비아 달러였다. 텐트가 만 원 대라니, 아주 훌륭하다.

 “이거 밤에 좀 춥겠는데?”

 아저씨가 텐트 그림을 보며 말했다. 텐트의 한 쪽 면이 모기장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지금 아프리카 겨울이어서 한쪽이 이렇게 열려 있으면 안 될 텐데.”

 나는 종업원에게 질문을 했다.

 “저기, 혹시 이거 덮개가 있는 건가요?”

 그는 영어를 잘 못하는지 잠시만 기다리라며 어디에선가 자신이 아는 한국인을 불러왔다.

 “아, 한국 분이세요? 텐트 사려고 하는데 이렇게 그림처럼 모기장으로 되어 있는 거라면 밤에 추울 것 같아서요. 혹시 덮개가 있는지 알 수 있나요?”

 불려 온 한국인은 한국어와 중국어를 통역했다.

 “이 사람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요.”

 내가 한국 사람을 통해서 종업원과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아저씨는 유키 형과 일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키 씨, 이거 아무래도 열려있는 게 맞는 거 같죠?”

 “그렇게 보이기는 하는데 확실히는 모르겠네요.”

 아주머니도 한국어로 “이거 위에 천막을 덮으면 안 되나?”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여섯 명이 밀집되어 있는 가게 안의 좁은 공간에서 한국어와 중국어와 일본어와 영어의 4개 국어가 마구 뒤섞이는 진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어수선한 난장의 결말은 꽤나 시시했는데, 직접 텐트를 하나 열어본 결과 모기장 위에 겹으로 천막이 하나씩 달려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만족하고 아저씨 아주머니 부부가 1대, 유키 형 1대, 내가 1대를 사서 가게를 나왔다. 이후에는 매트리스와 담요를 찾으러 주변 상가들을 돌아다녔는데, 나와 유키 형은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하고 아주머니는 90 나미비아 달러에 담요를 하나 샀다. 나는 매트리스를 굳이 살 이유를 못 느끼기도 했는데 가지고 다니는 침낭이 두 개여서 하나는 깔고 하나는 덮으면 밤에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는 거리에서 팔고 있는 소시지와 고기로 해결했다.

 “이거 먹어도 괜찮은 거겠죠?”

 “익히면 괜찮아. 돌아다니면서 길거리 음식도 먹고 하는 거지, 뭐.”

 돈을 건네자 장사하던 사람은 옆에서 널찍한 고기를 꺼내다가 석쇠 위에 척 올렸다. 그는 소금과 후추로 고기에 간을 하며 옆에 놓아둔 익은 소시지를 잘랐다. 맛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구워 먹는 목살, 그리고 소시지 맛과 같았다. 우리 넷은 각자 20 나미비아 달러 정도로 식사를 마친 뒤 다시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물론 택시비는 1인당 10달러씩이었다.


 2시 45분에 숙소에 도착하여 타카코 누나가 오기를 기다린 뒤, 다섯 명의 일행은 시내의 대형 쇼핑몰인 ‘원힐 파크’로 향했다. 나미비아에 5일 내지 일주일을 머물며 나미브 사막과 스바코프문트를 돌아보고 바로 나이아가라 폭포, 이구아수 폭포와 함께 세계 3대 폭포로 꼽히는 빅토리아 폭포에 가려던 예정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되었으므로 아무래도 전화를 개통해야 할 것 같았다. 전화 개통을 위해 쇼핑몰 1층 위치한 MTC라는 이름의 나미비아 통신사의 판매 사무실에 들어섰다.

 “심카드는 7 나미비아 달러고요, 데이터 가격은 여기 보시는 표와 같아요.”

 표를 보니 1 기가바이트에 295 나미비아 달러였다. 유심칩 700원에 데이터 29,500원이면 보름 정도 머물기에 적당할 것 같았다. 대한민국 휴대전화 번호와 호주의 휴대전화 번호 이후 세 번째로 나에게 생긴 전화번호는 ‘+264 81 544 540’이었다. 혹시 문제가 발생하면 요긴하게 사용하게 되리라.

 각자 휴대전화를 개통한 뒤 픽앤페이에서 빵, 햄, 참치 통조림, 양배추, 마요네즈, 치즈 등 샌드위치 용 재료와 파스타면, 케첩 등 파스타 재료 등을 총 800 나미비아 달러가 넘는 비용을 들여 구입했다. 다른 일행들이 장을 정리하는 동안 아주머니와 나는 바로 옆의 픽앤페이 리큐르에서 술 세 병을 샀다. 여행을 다니며 냉장보관을 할 수가 없으므로 아쉽지만 맥주는 제외했다.

 “그런데 이거 데이터가 안 되는데. 성민아, 너는 되니?”

 아저씨가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말을 꺼냈다.

 “아니요, 저도 아직 안 되네요.”

 MTC 통신사의 판매점은 1층에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판매만 할 뿐, 다른 일을 하는 서비스 센터는 2층에 있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와 유키 형은 침낭과 매트를 사겠다고 흩어지고 타카코 누나 혼자 1층의 에스컬레이터 옆 쉼터에서 기다렸다.

 “아, 아저씨. 뭘 설치해야 하나 본데요?”

 2층을 헤매던 도중 휴대전화에 온 문자를 유심히 보다가 해결 방법을 찾았다. 문자에 첨부된 내용대로 했더니 곧 데이터가 연결되었다. 그동안 아주머니는 매트 하나를, 유키 형은 250 나미비아 달러 정도 가격의 침낭 하나를 각각 사 왔다.


 숙소에 복귀하여 내 방에 짐들을 다 몰아 놓은 뒤 내일 아침 7시 반에 카멜레온 백패커스에서 만나기로 하고는 타카코 누나, 유키 형과 헤어졌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오늘 밤에 카멜레온에서 묵기로 했다.

 “저녁은 어떻게 할까요?”

 “라면 있으니까 소시지랑 고춧가루 넣고 끓여먹자.”

 어떻게 된 일인지 한국에서보다 아프리카에서 라면 먹는 비율이 훨씬 높은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굳이 라면이 아니더라도 면 요리는 거의 매일 먹고 있었다. 쌀밥을 구하기는 어려우므로 끼니를 때우려면 면, 빵, 시리얼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데 나는 찬 음식보다는 따뜻한 음식을 훨씬 선호하기 때문에 빵과 시리얼로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은 그다지 취향이 아니었다. 그도 아니면 조리하기 쉬운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사다가 구워 먹는 방법도 있었지만 가격 문제도 있었고, 아직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 때문인지 끌리지는 않는 선택이었다.

 이곳의 라면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이어서 역시나 한국 라면의 절반 정도 크기였기 때문에 세 명이 먹을 분량으로 다섯 개를 끓이고 고춧가루와 소시지를 더했다. 바에서는 적포도주와 백포도주를 한 병씩 사고 맥주도 필요할 때마다 사서 아저씨, 아주머니와 함께 마셨다.

 분명 혼자 떠나온 여행인데, 나는 계속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었다. 고춧가루로 얼큰한 맛을 낸 아프리카의 라면 국물을 한 모금 넘기고 아저씨, 아주머니와 잔을 부딪쳤다.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어떻게 즐길 것인지, 또 왜 그리 할 것인지. 처음 만난 우리들은 이야기할 것이 참 많았다. 학교 선배와 학교 후배도, 직장 윗사람과 직장 아랫사람도, 조언자와 내담자도 아닌,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이야기들. 검은 하늘 아래 은은한 푸른빛의 수영장을 보며, 술과 대화가 오가는 탁자 옆에 앉아 곰살궂은 밤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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