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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활여행자 Dec 23. 2023

신들의 섬에서 만난 서핑 2

발리 두 달 살기

이 시리즈는 안식년 중 여행을 하면서, 비체육인으로서 살았던 과거를 청산하고 내 몸과의 새로운 관계를 쌓아 올리게 된 성장 이야기이다. 


발리, 서핑 2


이곳에서 초보자들의 서핑 여정은 캠프 바로 앞에 위치한 브라우니라는 해변에서 시작된다. 브라우니라는 이름에 무색하게 이 해변의 파도는 쓰고 또 무자비하다. 이다지도 얕은 물에서 파도는 내 키만 한 높이를 쌓아 올리고 또 무너뜨린다. 더 깊은 물로 들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어렵고 무겁게 겨우 떼어야 할 정도로 파도는 엄청난 힘을 자랑한다. 그런 파도를 향해서 걸어 들어가다 보면 마음의 소리는 멈추라고 외친다. 위험해 보이는 상황에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려고 한다니, 안전이란 관념은 쌍수를 들어 날 막아보려 한다.


아무쪼록 그런 파도를 잘 ‘타보는’ 게 수업의 목적이다. 넘어지고 비틀거리는 건 서핑 초보자의 숙명. 운 나쁘게 넘어지는 타이밍이 잘(?) 맞아 부서지는 그 찰나에 휘말려 들어가기라도 하면 파도의 에너지는 사지를 사방에서 끌어당긴다. 흔히 통돌이라고 일컬어지는 말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세탁기 안에 들어가기라도 한 듯이 사방으로 잡아당기는 와중에 물은 열심히도 코를 찾아 맵고 시큰하게 들어간다.


서핑 끝에는 상처뿐인 영광 


파도의 세기에 익숙해질 쯤이면 그 두꺼운 두께와 듬직한 무게로 안정감을 주던 스펀지 보드에 안녕을 고해야 한다. 얇고 날씬한 하드보드와 친해지기까지는 시간이 또 필요하다. 하드 보드에 올라타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더 어렵기 때문. 하드보드에서의 팝업을 해내고 나면 이제는 턴을 할 시간이다. 내가 구루라고 부르던 초급반의 강사는 자주 길이 남을 주옥같은 명언을 던지곤 했다. ‘내가 보드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보드가 나를 따라가야 하느니라.’


엎치락뒤치락 보드냐 나냐 힘겨루기 하다 보면 구루는 이미 나를 떠나보낼 준비를 마쳤다. 중급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메데비 포인트로 보낼 준비가. 메데비 포인트는 파도가 부서지는 여건에 편차가 크지 않고 세트 파도에 밀리지 않고 라인업으로 갈 수 있는 채널이 있어 초-중급자에게 인기가 많은 서핑 스폿이다. 그랬다. 나는 하얗게 부서지는 화이트 워터를 뒤로 하고 그린 웨이브를 만날 때를 맞이한 것이다.


화이트 워터는 파도가 이미 부서지고 깨진 시점에 보드에 올라서게 되는 것으로 힘이 세기에 초보자들이 서핑을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린 웨이브는 이미 깨지지 않은 파도로 파도를 잡는 것도, 보드에 올라서는 것도 훨씬 복잡하여 초·중급자의 영역으로 알려져 있다.


초중급자의 성지 메데비 포인트


(강사가 밀어주는 덕에) 그린 웨이브를 탈 수 있게 되면 서핑의 여정은 끝!이라고 말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직진으로 가는 대신 턴을 해줘야 하고, 그다음엔 그냥 턴 대신 파도의 립이라 불리는 입술에 올라가 에너지를 받고 다시 바텀으로 내려오는 연습을 해야 하고, 그다음과 또 다음엔… 이렇게 서핑 배움의 길에는 끝이 없다.


파도를 잡는 찰나의 순간에는 한 열다섯 가지 정도만 기억하면 된다. 됐다 싶을 때보다 한 두 번 정도 팔을 더 휘저을 것, 정면으로 패들링을 하되 턴이 쉽도록 보드에 약간의 각도를 줄 것, 파도의 속도를 받아서 나가는 기분을 확실히 느끼게 되면 일어설 것, 그러나 빠르게 깨지는 파도에는 더 빨리 팝업 할 것, 파도가 빨리 부서질수록 바로 일어서자마자 턴을 할 것, 턴을 할 때는 발가락 끝에 무게를 실어볼 것, 동시에 뒷다리에 무게 중심을 잡아볼 것, 시선과 팔은 나아갈 곳을 향할 것,…


기가 막힌 타이밍과 강사의 힘 좋은 밀어주기, 전생에 쌓아놓은 운 삼박자가 합을 이뤄서 파도라도 잡게 되면 모터를 달은 마냥 보드로 물 위를 가로지르게 되는데 그 기분은 째진다는 말 말고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다 보드에서 넘어져 탁한 바다의 입 속에 삼켜지고 나면 파도의 에너지가 온몸을 휘감으면서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내가 서핑을 사랑하게 되었구나! 깨달은 순간은 바로 그 통돌이마저도 아름다워지기 시작하면서다.


일주일간 동고동락한 운명 공동체 캠프 친구들


퀘스트를 한둘씩 깨 나가면서 어느샌가 나는 방학 사이 훌쩍 커버린 소년들처럼 한 뼘 자라 있었다. 매일 무섭게 집어삼키는 브라우니 해변의 파도가 더 이상 두려워지지 않은 건 매일 그 속으로 전진해 나가길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밀어붙이고, 조금 더 깨져보고 나니 내 시련의 문턱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있었다.


이제 친절하고 작게 부서지는 파도를 볼 때면 '아마 못할 거야' 대신 '어쩌면 해낼 수 있을지도'라는 마음으로 보드를 빌린다. 여전히 패들링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지만, 물에 빠지고 또 구르는 걸 피할 수 없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서핑이 끝나고 먹는 미고랭은 맛이 끝내줄 것이라는 걸.


고꾸라지는 서핑 초보의 영상 일기가 궁금하시다면 >>

https://youtu.be/PBAhjWCweJw?si=vyIu1DaokF_W1KV8

PC: https://www.instagram.com/michael_f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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