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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Sep 16. 2024

가을의 문턱

마감 후 새벽 길을 걷는데 연달아 초록불에만 걸리자 선배가 말했다. "쉬질 못하게 초록불이 계속 켜지네." 그런 사고방식은 가져본 적이 없어 조금 놀랐고, 아직도 종종 기억난다. 난 초록불이 연달아 켜지면 계속 갈 수 있어 운이 좋다고만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4계절이 뚜렷한 탓에 옷을 자꾸만 새로 사야 한다고 말한 분도 있다. 그것도 신선해 기억에 남았다. 난 그냥 가을이 오면 트렌치 코트 입을 수 있어 좋다고만 생각했지. 참 환경에 잘 순응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난 여름이 좋은데, 해가 길고 수영이 쉬우며 옷입기가 간편해서다. 덥고 힘든 건 옷 입는 게 간편한 나라에 와서 고민이 아니게 되었다. 한국에서라면 고민이 됐겠지만, 여기선 아니다. 지옥철이 없어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이 곳에 없다는 게 아니고 내가 안 탄다. 차라리 한 시간을 걷는 게 낫다.)


필요해서 산 것들을 하나씩 따져보며 출처를 묻는다. 이 물건은 언제, 왜, 어떻게, 얼마를 주고 샀고, 몇 번을 입거나 썼고, 빨래는 몇 번이나 했고.... 해져서 버린 물건들과 기부하고 온 새 물건들과 이런 저런 것들을 떠올린다. 소비에 대해 자꾸 생각한다. 의식주를 지키는데 들어가는 돈이 어마어마하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들어가는 돈에 절약이란 단어를 하루에도 몇 번이고 생각한다. 생필품은 또 어떤가. 샴푸, 컨디셔너, 바디워시, 핸드워시 같은 것들은 또 한 달에도 몇 번이나 닳아버리는지 원. 기본만 하자고 생각하는데도 소비는 끊이지 않는다.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돈이 나가고 있다. 선배가 말했다. 원래 집이 없으면 돈을 못 모아. 아 그런 거였나. 


치욕스러운 경험들이 떠오르는 날이 많아 나는 무작정 걷는다. 그러면서 긍정적인 것들을 생각한다. 그나마 낫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로 덮는다. 대부분은 거리의 달콤함에 지워지고 걸으며 느끼는 통증에 지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고 있는 것들은 목소리를 낸다. 어린 시절의 내가 정정당당하게 살아준 덕분에 지금의 나도 그럴 수 있다. 이 썩어버린 곳에서, 나는 썩지 않은 곳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자꾸만 밖을 본다. 어디든 고여있는 곳은 썩은 곳이다. 고여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악취가 나는 걸 싫어한다. 제게서 나는 악취를 모르고 킁킁거리는 인간은 더 멀리한다. 자격없이 손에 쥔 자들을 경계하며, 이 세상에서 또 뭘 배우려나 한다. 아무튼 난 여름이 좋다. 따가운 햇살로 다 밝혀버리는 그 여름의 맹렬함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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