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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Feb 06. 2020

온갖 지망생, 결국 망생, 하지만!!

숨겨진 론다의 성곽길


즐겁게 낭비한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

- 존 레논


산골 마을의 청량한 새벽 공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발코니에 섰다. 저 멀리 보이는 산맥 사이를 훑어보니 눈 운동하듯 아려오면서 눈물이 고인다. 시야가 확 트여 먼 산을 바라봐야 눈 건강에 좋다고 들었는데, 이 숙소에 와서야 눈 건강을 만끽한다. 노래도 흥얼거린다. 특별히 듣는 사람도 없으니 신경 쓰일 일도 없다. 새벽이라 약간 쌀쌀하니까 따뜻한 커피를 한잔 들고 다시 발코니로 간다. 선 굵은 목소리가 아름다운 프롬(FROMM)의 1집 [Arrival]을 틀었다. 론다의 새벽, 공기가 깨어나고 사람들이 깨어나고 빵과 추로스 배달꾼들이 움직인다. 청소부가 요 앞 술집거리에 무수히 쌓인 해바라기 씨의 껍질을 쓱쓱 쓸어낸다. 출근하다 또 산책하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먼저 올라!라고 외쳐주니 나의 흥도 눈을 뜬다. 어느새 음악은 4번 트랙 ‘좋아해’로 이어진다. 이 곡의 인트로 사운드를 참 좋아한다. 이제 씻고 빨리 관광객이 들이닥치기 전에 누에보 다리와 헤밍웨이 길로 가야지! 서둘러 샤워실로 GoGo-


프롬 FROMM [Arrival] 프로모션 사진 (2013)


그러나 이토록 융숭한 풍경과 편의를 제공하는 이 숙소에도 단점이 존재했으니 바로 샤워실의 물 빠짐이다. 어제부터 ‘소원을 말해봐’의 안무를 따라 하듯 다리를 착착 놀려가며 물을 배수구 방향으로 보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샤워부스 밖으로 물이 매우 넘쳐흘러 욕실 전체에 홍수가 나기 때문. 물 팡팡 틀고 파워 샤워를 하고 싶은데 범람할 것을 생각하니 시작 전부터 답답한 마음. 모름지기 대한민국에서 집을 볼 때 시원한 물 빨과 변기 물 빠짐을 미덕으로 삼지 않았던가! 그런데 가만 살펴보니 일자 드라이버로 돌리면 배수구를 열어 머리카락을 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저기 서랍을 살펴보았으나 공구는 없었고, 티스푼과 버터나이프 손잡이가 일자라 가져가 돌려봤으나 헛돈다. 도저히 방법이 없나? 진지하게 고민해보니 나에게는 쓸데없이 왜 가지고 왔나 싶었던 대한민국의 500원 동전이 하나 있었다. 각종 컨퍼런스, 대형 회의실, 공연장 바닥에 잠김-풀림으로 매립된 멀티탭 뚜껑을 늘 500원 동전으로 따지 않았던가! 크으—, 오늘을 위해 가져 온 500원이었구나! 신나게 500원을 꽂아 돌려봤다. 역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나사가 돌아간다 돌아가~~!


풀고 보니 손가락 3마디 분량, 검지 손가락 길이의 긴 나사였다. 그다음은 얽히고설킨 머리카락들 사이에 낀 미끄덩한 물때와 하수구 냄새를 10초간 참으면 될 일이다. 미리 준비한 포크로 파스타 면 말듯 돌돌 잡아 끄집어 올렸다. 응? 근데 왜 이렇게 무거워?? 응? 왜 이렇게 안 끝나?? 뭐야 더 길어??? 응?? 뿅?!! 갑자기 뚫어뻥 같은 뿅! 소리가 나더니 50센티미터가 넘는 물미역 형태의 괴생명체가 올라왔다. 이게 웬 월척...... >.< 근데 모발모발들 사이로 진짜 기괴한 물건이 하나 엉켜 있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끝부분이 돌돌 말린 흰색 라텍스 장갑의 엄지손가락 같았다. 그리고 바로 깊은 깨달음과 함께 몰려드는 쌍욕 - 야 이 ㅆ@#^&!)$*+ !!

내가 만 서른아홉 짤이라 망정이지. 인류 여러분, 애정 행위의 뒤처리 좀 잘합시다!!!


어쨌든 배수구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속 시원한 물 빠짐을 확인하니 더러운 기분도 좀 나아졌다. 그리고 마드리드의 첫 호스텔이었던 ‘파 홈 베르나베우’에서 겪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곳에서 사물함도 직접 고치고, JOB것과 the luv의 융단폭격을 버텨내지 않았던가! 론다에서도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다. (그리고 이후 단 한 곳의 숙소도 빼놓지 않고 뭔가를 고치고 다닌 미쇼 씨. 아래 링크 참조)

https://brunch.co.kr/@zzumit/44




이른 아침 누에보 다리. 조깅하는 커플.


굉장히 굉장한 파워 샤워를 마치고 발걸음 가볍게 숙소를 나섰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누에보 다리와 공원, 헤밍웨이 길을 걸어야지! 그리고 버스터미널로 가 내일 세비야로 갈 버스를 예약하고 오는 게 오늘의 목표다. 거리에 나서니 이른 아침이라 부지런한 관광객 몇 팀과, 주말을 맞은 동네 주민의 러닝만 눈에 띄었다. 누에보 다리 협곡 아래 포토 존에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 그렇게 한적함을 느끼며 론다 전망대와 공원, 헤밍웨이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페인의 국영 호텔 ‘파라도르(PARADOR)’에 숙박하면 론다의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다른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정말 위치가 깡패였구나. 누에보 다리와 협곡, 전망대, 산책로, 헤밍웨이 길 모두가 파라도르 호텔을 둘러싸고 있었다. 호텔 내 카페에서는 고품격 조식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내 조식은 답정너. ‘뽀라’를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딛는다.


역시 갓 튀긴 뽀라와 초콜라떼, 카페 꼰 레체의 조합은 떡순튀에 대적할 만하다. 어제와 같은 2층 창가 자리를 잡았다. 럭키-. 하지만 배가 심하게 부른 것 같아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빙~~~ 돌아 새로운 길 탐험에 나섰다. 숙소에 준비되어 있던 지도와 추천 명소에 표시된 ‘비에호 다리(Puente Viejo)’를 가보기 위함이었다. 이 곳은 누에보 다리가 생기기 전 론다 구시가와 신시가를 이어준 다리 중 하나였다고 한다. 지금 내가 걷고있는 길 양 옆으로 건물 구석구석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곳이라던데 아.., 정보를 너무 모르고 왔다. 자꾸만 론다에게 미안해지는 미쇼 씨. 심지어 바닥의 돌들한테도 미안했다.


아침엔 햇볕도 쨍쨍했는데 산골답게 날씨가 급변한다. 걸음을 재촉해 길가의 작은 이정표를 보고 비에호 다리를 향한다. 찾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주 꼬불꼬불 거대한 협곡을 잇는 아름답고 투박하고 아담한 다리였다. 이제 어떻게 숙소로 돌아가는 게 현명할까 구글맵이 열일을 해줄 찰나, 동네 꼬마들이 뭐라뭐라 떠드는 소리가 난다. 한 녀석이 뽀르르 달려가는 게 보였다. 오늘도 빼꼼 고개를 내밀면 어제의 결혼식처럼 뭔가 재밌는 광경이 나와 줄 것 같아 아이들을 따라가 보았다. 아이들은 계단 10개 정도 내려가면 있는 작은 광장에 모여 소꿉놀이 중이었다. 그리고 그 광장 왼편으로 오래된 아치를 시작으로 한 성곽길이 나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애기들 빼고는 사람이 없다. 정오를 넘은 주말인지라 바로 앞 비에호 다리엔 그래도 조금 사람들이 있었는데, 여기는 애들 소리 빼면 고요함 그 자체다. "위험하려나...." 궁금한 마음에 우선 아치로 가 성벽 바깥을 내려다보는데, 어머나 이 광경은 무엇인가요? 과격한 심장박동이 시작되고 아래에서 위로 휘이잉~ 날쌘 바람이 불어 멋지게 머리카락을 휘날려 주었다.  


비에호 다리 전경


때마침 작은 체구의 서양 부부가 아치를 지나 성곽길로 전진했고 그 틈을 놓칠세라 재빨리 부부를 뒤따랐다. 다행스럽게 그들도 성곽 밖의 풍경에 사로잡혔는지 사진도 찍고 주변도 구경하며 천천히 걸어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성벽의 정식 명칭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왔다. 이름하여 '시하라 성벽(Murallas de la Cijara)'으로 Murallas de Ronda 또는 Wall of Ronda로 알려진 길이다. 이 무렵부터는 사람들이 조금씩 더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퉁이마다 고양이가 보였다. 누에보라는 새 다리가 놓이고 사람의 왕래가 뜸해진, 천년이 넘은 이 길의 주인은 다름 아닌 고양이다.  그뿐이랴, 분명 이 길들에도 이름과 사연이 있을 텐데.., 그러고 보면 ‘존재’하는 것엔 늘 이야기가 뒤따른다. 내 이야기는 자연스레 태어난 날부터 시작되겠지. 하지만 지구 반대편 스페인의 남부, 성벽 도시 론다에서 천년도 넘은 성벽에 올라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존재’하게 된 나의 이야기는 어디부터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빗소리에 잠에서 깨 주방에서 펑펑 울며 삶의 우선순위를 잘못 두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일까? 마흔을 넘기기 전에 용기를 내보자고 결심한 순간일까? 건강을 이유로 서른여덟에 강제 은퇴하고 음악 일을 그만두게 된 그때일까? 잘 나가던 커리어를 접고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느닷없는 개발자 일에 뛰어들며 마음을 다친 순간일까? 돌이켜 보면 나는 무척이나 꿈이 많았던 사람이다. 어릴 땐 가수가 되고 싶었다. 사춘기 때엔 순수 미술가가 되고 싶었다. 여군도 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했다. 정말 가난했다. 그렇게 가난할 수가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언니는 ‘엄친딸’로 성장했다. 중고교 6년 동안 모든 학기 장학생이었다. 전교 1등, 모의고사 전국 상위 1% 안에 드는 애들은 어떻게 생긴 건지 너무 궁금하다고 말하던 사람들에게 늘 ‘우리 언니’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그녀는 학교 공부 외에 입시 시즌에 논술, 수학 학원 정도를 다닌 게 다였다. 대학에서도 전액, 전 학기 장학생이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과외를 줄줄이 해 가난한 집안의 기둥으로 우뚝 선 우리 언니에겐, 4학년 1학기부터 대기업이 줄을 서서 러브콜을 해왔고 2학기, 원하던 기업의 제안으로 오늘날까지 반도체 엔지니어로서, 부장님으로서 한 우물을 파고 있다.


Murallas de Ronda, 성곽길 너머의 풍경


하지만 우리 언니 또한 매일 칼날 위에 서있는 기분으로 울고 있다.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지만 조카들을 위해, 또 가족을 위해 기꺼이 그 칼날을 밟고 칼춤까지 춘다. 언니가 너무너무 힘들어할 때, 퇴직금도 넉넉하니 이제 그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난 회사를 관두는 법도 몰라...”라는 언니의 대답에 말문이 막혀 같이 한 숨만 내쉬던 기억이 난다. 언니와 나는 언제나 반대였다. 언니의 번듯함 뒤에 숨어서 나는 늘 자유롭게 살았고, 나 하나의 입만 책임지며 살았다. 나야말로 한 회사에 뼈를 묻고 오래 다니는 법을 모른다. 자신있게 사표를 던질줄은 안다. 예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특징상 그렇게 하고 싶지만 항상 회사가 망하던지, 위대한 꼰대와 양아치들을 떠받드는 자리에 있었어야만 했기에 늘 싸우며 일해야만 했다.


그래서 내 꿈이 더욱 여러 갈래였는지도 모르겠다. 음악 일을 하며 이 직종의 생명이 길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기술이 필요했다. 우선은 전공했던 디자인을 살려 음반 커버, 포스터 디자인 아르바이트와 음악 매거진에 앨범 리뷰, 공연과 페스티벌 취재, 아티스트 인터뷰, 앨범 보도자료를 기고해왔다. FM 라디오에서 6년간 인디음악을 전문으로 소개하는 ‘선데이디스코 인디통신’을 진행하기도 했다. 일본 뮤지션과의 교류가 활발해졌을 때 일본어 관광 통역사를 지망하며 일본어를 공부했었고, 제과제빵사를 꿈꾸기도 했다. 늘 마시는 커피를 전문적으로 알고 싶어 바리스타 자격증도 땄다. 이후 유럽 바리스타 자격증 취득에 이어 15년의 홈 로스팅에서 벗어나 진지한 로스팅 수업도 받았다. 지금은 A의 도움으로 스토리텔링을 코칭받으며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



성곽길의 틴에이져


나는 만으로 서른아홉, 론다의 성곽길을 걷고 있는 이 순간에도 ‘온갖 지망생’을 꿈꾼다.

하지만 결과는 어느 것도 딱! 이뤄지지 않은 ‘그냥 망생’이다.     


이 숨겨진 성곽길 모퉁이에 한 연인이 앉아 샌드위치를 나눠먹고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동네의 틴에이져! 그들이 있다는 이야긴 이 성곽길이 핫플레이스라는 반증 아닐까? 그래, 오늘까지는 망생이어도 핫플레이스 찾는 본능적 기술만큼은 뛰어난 나다. 순간을 즐기는 기술도 뛰어난 나다. 국적은 달라도 맥주 PUB에서 무알콜 상태로 외국인들과 즐겁게 소통하며 몸치 탈출 땐스 교실을 여는 나다.


영국의 위대한 밴드 ‘비틀즈’의 목소리, 존 레논이 말했다.

“즐겁게 낭비한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라고.     


시간은 흘렀다. 최근엔 무기력함을 떨져내지 못하고 의미없이 흘려보낸 시간도 적지 않아 나태지옥에 떨어질거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상념에 잠긴 채 비에호 다리를 건너 숙소로 돌아오는 길. 틴에이저들이 먹던 하몽 샌드위치 ‘보까디요’가 탐이나 나도 하나 사 왔다. 하몽과 띤또 데 베라노(Tinto de Verano, 여름용 와인 칵테일. 논-알콜도 있음. 다음에 특집으로 다뤄드릴 예정)가 있으니 남은 론다에서의 하루는 더 고요히 정리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담담한 기분, 무언가 충전된 느낌으로 다음날 론다를 떠나 세비야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론다를 바라보며 다시 꼭 만나자고 다짐했다.


BGM ㅣ프롬(FROMM) - 좋아해

https://youtu.be/VHHhym_Ku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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